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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사표음

유일한 사치

by 헤세

2025. 01. 17(금)

나에게 유일한 사치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만년필을 사 모으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비싼 것을 사지는 않는다. 새로운 디자인의 만년필을 사서 정성스럽게 잉크를 넣고 한 글자 한 글자를 노트에 써가면서 묘한 즐거움을 얻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글씨체도 틀이 잡혀 운치가 있다. 아날로그가 주는 매력이다. 키보드로 글자를 입력하는 것은 디지털 문명의 상징이기도 하고 편리하다. 하지만 거기에는 개성이 담긴 내 정신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글자 속에 나의 일상의 감정들, 예를 들면 외로움과 슬픔, 기쁨, 분노 등이 고스란히 투영된다. 어떤 날은 글자들이 춤을 추며 화려하게 노닌다. 어떤 날은 자음과 모음이 일그러져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 따로 놀기도 한다. 나는 갖가지 색깔로 책을 읽은 나의 느낌과 글을 쓸 당시, 나의 생각을 표현한다. 이런 것이 아날로그의 매력이다. 노트에 기록하면서 펜촉에서 느껴지는 질감은 키보드의 타격이 따라올 수 없는 감각적 쾌감이다.

물론 수고스럽다. 결국에는 키보드로 옮겨 다시 입력해야 한다. 다시 옮겨 적으며 흔히 말하는 수정, 퇴고를 한다. 기록된 노트의 권수가 늘어갈수록 새로 구입한 잉크병의 수위가 낮아질수록 나의 사유의 깊이가 더해진다는 뿌듯함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나만의 세계가 있고 그 공간에서 자유롭게 거닐며 종횡무진 사유의 춤을 출 때 행복을 느낀다. 일종의 황홀감에 사로잡힌다.

단사표음, 대나무 그릇에 담긴 밥과 표주박의 물 한 그릇. 소박한 선비의 검소한 생활을 이르는 말이다. 거대한 욕망 말고 작은 일상에 만족하며 학문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선비의 삶이다. 아마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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