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의 만남
2025. 01.18 (토)
어제저녁 가을이를 만났다. 일 때문에 서울에 와서 아빠와 밥을 먹으려고 전화했단다. 나름 사회생활을 통해 조금은 어른스러워진 것 같아 흐뭇하다. 지난 시절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돌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참 부족한 부모였다. 정서적으로 좋은 기억과 추억을 많이 주지 못했다. 많이 아쉽고 미안하다. 역부족이었다. 지금이라면 하지 않았을 모습을 많이 보여 주었다. 부족하고 미성숙한 아빠였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기대하던 바는 있었다. 내가 그랬듯이 지금보다 더 성숙한 어른이 되면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부모가 최선을 다해서 자신들을 돌보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 바랐다. 자기들도 부모가 되어 자식을 키워보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거라는 기대였다. 나 역시 젊은 시절 어느 순간에 나의 부모님이 자식을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지 깨닫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 순간 원망과 미움의 감정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순간 용서가 시작된다.
나의 두 자녀에게도 그런 날이 오기를 내심 기대했다.
자고 일어나니 벌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보며, 가족들이 이런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걱정하며 불안과 초조에 고통받는 자식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 있다. 카프카의 <변신>이다. 가족들은 벌레가 된 자신을 혐오하며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데 오직 어머니만이 먹을 것을 주며 따뜻하게 대해준다. 사실 이 자식은 그동안 집안을 먹여 살리며 열심히 살았던 가장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벌레가 된 자식을 냉대하며 무관심해지기 시작한다.
가족은 쓸모이전에 존재만으로도 의지하고 위안이 되는 관계이다. 사랑으로 감싸며 세상을 살아가는 데 격려와 위로를 주고받는 관계이어야 한다. 가족마저 쓸모에 의해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모습은 앞으로 도래할 미래사회를 예견하는 카프카의 통찰이었다. 결국 주인공은 좌절과 낙담 속에 목숨을 잃고 남은 가족들은 조금의 추모와 슬픔도 없이 즐거운 가족 소풍을 떠난다.
카프카의 내면은 참으로 외롭고 슬펐던 것 같다. 그의 예민한 직관은 앞으로 다가올 자본주의가 어떤 모습으로 인간관계를 바꾸어 놓을지 알고 있었다. 존재 자체만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사랑받는 최후의 보루 하나쯤은 남아 있어야 전쟁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가족에게 사랑과 격려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책임이 성인까지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라는 나름의 기준이 있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아직 덜어내지 못한 부감감이 있다.
오로지 자신들의 힘만으로 앞으로 겪게 될 삶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힘든 현실에서 조금의 보탬이나마 부모가 감당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종류의 문제들이다. 정작 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기도 하다.
정신적으로 성장한 자녀들이 앞으로 나와 어떤 관계의 질적 변화를 가져올까 내심 기대되기도 한다.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가며 서로 힘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 가지 드는 생각은 가족관계도 다음을 말하기보다는 지금 당장이 필요하다 지금 사랑한다 말하고 지금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느껴지는 마음의 거리가 더 중요하다. 부디 어려움에 직면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부모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소망 중의 하나이다. 가족은 힘든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