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2017. 4.13(목), 2025.01.25.(토) 부분 수정
한 사람의 정신과 생각을 형성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러나 본인이 미처 의식할 수 없던 시기에 받아들였던 여러 자극들과 감정은 매우 강렬하여 그의 무의식을 지배한다. 번득이는 지성으로 여러 문제작을 남긴 카프카가 대표적인 예이다. 태어날 때부터 병약하고 예민했던 그의 기질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정신세계에 가장 많이 영향을 준 사람은 아버지이다. 카프카는 아버지를 폭군이라고 불렀다. 자식을 끔찍이 사랑한 나머지 당신이 계획한 길이 자식을 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아들에게 강요했다.
벗어날 수 없는 아버지의 울타리 안에서 카프카는 안으로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문학만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독서가 얼어붙은 그의 내면을 도끼로 내리쳐 깨어지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에게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는 눈이 있었다.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근원적 불안을 포착했다. 그것은 부조리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이러한 인식은 그의 소설 <변신>과 <심판>에 잘 드러난다. 현실의 사랑은 언제나 비참했고 오직 문학만이 탈출구였다. 카프카는 꺼져가고 있었다. 너무 활활 태워 꺼져가고 있었다. 장편소설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미완성 소설이 많은 이유이다. 41살에 세상과 이별했다. 너무 짧았다. 하지만 강렬했다.
예술가의 삶을 살펴보면서 신은 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범인들의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예술가들은 압축해서 강렬하게 살다가 가는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 고통을 불러오는 자학은 아니지만 압도적으로 예민하고 초월적인 감각으로 타인이 느끼지 못하는 고통을 느끼면서 그 고통의 흔적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카프카의 후예들은 그가 남긴 작품을 보며 절망하게 되고 나아가 자신들을 학대하면서 마조키스트가 된다.
예술가에게 평온한 삶은 저주이다. 결핍과 아픔은 지성을 극대로 끌어올려 천재적 광기를 분출케 한다. 성장환경과 시대적 정서는 예술가에 많은 영향을 준다. 작품의 아우라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이다. 영혼의 결핍을 소유한 사람들은 카프카를 보면서 위안을 얻는다.
<부조리>는 카프카 문학의 실체요 정수이다. 삶은 부조리의 연속이다. 인간의 실존은 부조리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행복하다고 착각하면서 부조리를 외면하거나 의식의 뒤편에 묻어버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간다. 꺼내어 보면 볼수록 답을 알 수 없는 부조리의 실체에 압도당한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절규한다.
나는 왜 가난한가? 왜 나에게 죽음이 다가오는가? 왜 내가 암에 걸렸지? 이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이다. 과학자도 죽음 앞에 서면 죽음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
이별과 버림받음으로 상처받고도 살아가야 한다. 부조리 속에서도 생은 유지되어야 하고 웃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카프카는 해답을 주지 않는다. 부조리가 우리 가운데 있다고만 말해준다.
숨 쉬고 먹고 자는 것만으로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회를 이루고 관계를 맺으려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본능 이상의 필요와 욕구가 존재한다.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고 세상에 가치를 부여하고 살아가는 목적에 대해 탐구한다. 이미 많은 철학자들이 앞서서 이 문제를 고민했다. 대표적인 철학자가 하이데거이다. 그는 먼저 ‘존재’를 묻는다. 이 질문은 인간이 던지는 질문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인간이 없는 세상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 것은 무용하다. ‘존재’를 묻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존재와 다른 ‘현존재’이다.
서양사상은 이성 중심의 철학이다. 합리성이 바탕이 되어 이성을 통해 과학을 발전시켰다. 이성중심의 철학이 가닿은 종착지는 허무주의이다. 감정이나 욕망이 전제되지 않는 합리주의의 귀결이 허무주의이다. 합리성을 가진 인간이 오로지 합리적 행동만 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합리성은 하나의 특징이지 본질이 아니다. 인간존재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는 존재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서구정신은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한다. 환경파괴, 식민지배, 전쟁 등이 합리주의의 귀결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
‘현존재’ 인간은 생명활동을 하고 있으며 다른 존재와 달리 본능 말고도 욕망이나 관심을 가지고 움직인다.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현존재의 특징은 ‘가능성’이다. 자신의 상태를 이전과 다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다. 현존재는 무수히 많은 다른 존재 및 현존재들과 관계를 맺으며 관심과 에너지를 투여하고 선택과 포기를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구현한다. 그 가운데 만족을 얻으며 행복을 찾는다. 그때 비로소 현존재는 실존한다. 자기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된다. 실존은 현존재가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선물이다.
동시에 현존재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현존재의 가능성은 다른 말로 불확실성이다. 될 수도 있지만 안 될 수도 있다. 현존재의 불확실성은 근원적 불안을 초래한다. 그러나 현존재에게도 가장 확실한 미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가능성이 아니라 필연이다. 현존재가 자신의 사고로 이 필연을 받아들인다면 그가 해야 할 일은 이 죽음을 뛰어넘는 일이다. 영원을 사는 것이다. 생물학적 의미의 영원이 아니라 실존적 의미의 영원이다. 자신의 미래상을 꿈꾸며 현실로 만들기 위해 지금 주어진 시간을 최선을 다해 초인처럼 사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기획투사라고 불렀다. 기획투사의 삶에는 허무주의가 끼어들 틈이 없다. 현존재는 시간 안에 있다. 현존재의 역사성이라고 한다. 주어진 역사성을 자각하고 관심의 영역을 제한적으로 설정하고 구체적인 미래상을 그린다. 그리고 현실로 만들기 위해 지금을 영원처럼 사는 것이다. 마침내 미래는 나에게 다가온다.
세상에 내가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모두 내던져진 존재이다. 모든 것은 열려 있고 가능성으로 주어진다. 현존재는 이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살아간다. 오직 현존재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 실존할 것인가 가능성을 구현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할 것인가? 죽음을 초월하는 실존의 길은 현존재에게 열려 있다.
카프카는 자신이 남긴 작품으로 영원을 살고 있다. 예술가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 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온갖 상처를 몸에 지닌 채 실존의 의미를 찾아가는 초인, 매력적이지 않은가? 언제부터인가 나는 나의 시간을 카운트다운하고 있다. 10,9,8,7,6...........
놀라운 것은 줄어들면서 늘어나고 있다. 시간 안에 숨겨져 있는 비밀이다.
<작아지는 것>
처음에는 아주 컸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그것의 크기를 재보지 않았다.
생각조차 없었다.
무한의 기쁨, 이 상태가 지속될 거라 생각했다.
낙엽이 몇 번 지고 가끔 생각나긴 했다.
그래도 젊음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리라 믿었다.
작아질수록 커지는 밀도. 그런 걸 본 적 있나?
작아지면서 끝도 없이 펼쳐지는 저 무한의 세계.
이런 신비를 경험해 보았나?
갈수록 작아지는 그럴수록 넓게 펼쳐내는 극한의 몸부림
마지막 한 점으로 남아 스러질 때 그때가 절정
절정은 앞당겨 올 수 없다.
절정은 사라지기 직전 바로 그때
세상의 신비 다 알지 못해
알 때쯤 떠나는 것도 축복
나의 존재 또한 기적
얼마나 살아야 알 수 있을까
얼마나 죽어야 알 수 있을까
날마다 죽는다. 태어나기 위해
날마다 태어난다. 죽기 위해
이제는 많이 짧아졌다. 최대한 길게 펼쳐본다
그래도 어디냐 지금이라도 시작하는 게
나는 줄어들면서 펼치고 있다
튀르키에 이즈미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