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의사인 프로이트가 인간의 모든 행동의 이유를
‘무의식적인 성적 충족의 추구’로 설명하는 이론,
즉 리비도(Libido)를 정립한다.
프로이트가 그런 이론을 정립하기 전에
막연히 그걸 느끼는 사람도 있었을 테고
몇몇 철학자들도 원시적인 주장을 했다.
성적인 이야기가 꺼려지는 분위기에서 강하게 주장을 못했거나
어렴풋이 그렇게 느꼈더라도
이론으로 정립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나 보다.
프로이트보다 66년 먼저 태어난 쇼펜하우어도
성적 욕망의 철학적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하길
“남녀관계가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의 핵심이자,
전쟁의 원인이자, 평화의 목적이 바로 성욕이며
성욕이 인간의 욕망 중 가장 강력한 것이다.
성욕이란 인간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려는 방안이다.
또한 인간의 의지 중에서도
종족 보존의 욕망이 자기 보존의 욕망보다 강하기에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되고,
상대의 본질을 모른 채 불행한 결혼에 뛰어든다”라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면서
저런 주장을 했다는 게 신기하다.
어쩌면 맹목적으로 될 거 같은 자신의 사랑을 꿰뚫어 보고
독신으로 살았는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Plato)도
에로스(Eros)를
‘단순한 육체적 욕망이 아닌, 진리와 아름다움을 향한 상승적 사랑’으로
즉, 리비도의 철학적 조상 격으로 에로스를 설명했다.
프로이트의 제자였던 칼 융은 리비도 이론을 더 확대하고 성숙시켜
“리비도를 단순히 성욕이 아닌,
삶의 의미를 찾는 여정을 추진하는 에너지”라고 했다.
결국은 플라톤의 영향을 쇼펜하우어가 받았는지 모르지만
쇼펜하우어가 프로이트에게 영감을 주고,
프로이트가 이론을 만들고
칼 융이 프로이트 이론을 더 다듬었다고 볼 수 있다.
철학자가 아닌 내 눈에도
남녀의 사랑은 인간 역사의 주재료이고, 이유이고
종교마저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남과 여, 참으로 기이한 동물이다.
기쁨과 슬픔, 전쟁과 평화, 그 어디에도 깃들어있는 남녀 이야기
그토록 강한 성적 욕망을 갖고 맹목적으로 사랑한 이유가
자손을 얻기 위한 거였는데
그 자손이 불의의 사고도 아니고 불행한 선택으로 사라지면
그 리비도는 어떻게 다른 욕망으로 승화될 수 있을까?
심한 경쟁사회에서 힘들어하는 자식들을 키우는
어른의 리비도는 괜찮은가?
자식을 가지지 않으려는 젊은이들의 리비도는 어디로 전환되는지?
그냥 짐승적이고 원초적인 리비도로 돌아가는지?
한국 사회의 온갖 뉴스를 보면
프로이트의 고전적 성적 욕망 이론의 적용에
예외가 많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