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의 시간

190818

by 원호연


무슨 연유에서인지 갑자기 서랍 구석에 잠들어있던 외장하드를 꺼냈다. 평소 같았으면 10대 때 주야장천 듣던 인디밴드 음악들이나 미처 정리되지 못한 옛 사진이나 둘러보다 말았을 텐데, 오늘따라 꿈자리도 뒤숭숭한 탓인지 폴더를 타고 타고 들어가 옛 영상들을 꺼내어 보기 시작했다. 영상이 있는 줄만 알았지 각 잡고 재생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언제 찍었는지 찍어놓고 서로 확인은 했는지 그리고 왜 찍었는지조차 모르는 세기말 감성의 홈 비디오들이 화면을 채웠다. 2G 시절의 휴대전화 화질 그대로. 손사래 치는 손들을 마다하며 나는 왜 그때 그 시절을 꾸역꾸역 남겨놨을까?

살던 공간의 구석구석, 지나가는 버스들,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의 웃음소리, 귀찮아하면서도 영상에 담겨주는 동생, 마룻바닥에 케이크를 펴놓고 둘러앉아 생일을 축하하는 우리 가족, 집으로 걸어가는 나, 수많은 시간을 담았던 나. 그 작은 메모리 안에 행복을 담던 순간들​​

어쩌면 카우보이 비밥 속 페이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과거의 자신이 보낸 타임캡슐 비디오를 본 후의 심경 변화가 그러했을까. 자신이 태어난 지구로 찾아가, 본인이 살았던 그 집, 그곳 바닥에 자신의 영역을 그대로 그어놓은 채 드러누워 과거를 회상하는 페이 발렌타인

사람들은 미련이 남는 곳에 다시 온다고들 한다는 대사가 생각난다.

​​​


이곳으로 온 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었다.

내가 다음 공간으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이곳을 그리워하며 찾아올까 전보다 몇 배 아니 몇백 배로 커져버린 메모리칩을 들고 다니면서도 가족의 모습, 나의 공간은 남기지 아니하였다. 난 내 메모리에 무엇을 남겼을까

한순간 나를 달랠 수 있었던 비싼 카페 음료
감성 술집에서의 싸구려 네온사인
전보다 비싼 화장품을 바른 나와 나의 친구들과
비싸진 옷가지를 입은 나
가끔 사치스럽게 먹었던 음식 하나의 오백만 장
sns에 보여주기 위해 만든 집밥
기분을 알 수 없는 나의 얼굴들
그저 만남의 초점을 둔 기록용 사진들
또다시 미련 없이 지나가는 지하철
​기록하지 않았던 수많은 시간들...

​​​

나는 그토록 무엇을 향해 달려왔는지

그 오랜 시간 십수 년의 시간 동안 이뤄놓은 건 하나 없이 그저 이곳에서의 삶이 불만족스럽다며 과거 사진이나 꺼내 엉엉 울고 나 있었다.

지독하게도 행복했지만, 지독하게도 우울했던 지난 시간들이 두려워 돌아가고만 싶었던 난, 여전히 과거에 머무른 채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 불행한 일인 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않'고 있었던 걸까

저 영상들을 몇 년 뒤에 또 본다면 그땐 어떨까

그땐 지금보다 조금, 아니 아주 많이 행복해져 있으면 좋겠다.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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