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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 Aug 15. 2021

활시위를당길 순간



후덥지근한 공기를 머금은 여름은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들기도 하고, 신이 나게도 한다. 해가 일찍 뜨고 늦게 지기에 낮은 길어지며, 다른 계절보다 움직임의 제약이 적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어느 날, 원은 폭염주의보가 내린 오후에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며 남들보다는 조금 더 활기찬 바람을 맞는다.


원은 일찍이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생으로 지내고 있다. 남들은 무슨 죄를 지어 대학원에 왔냐고 한탄하지만, 원은 아무것도 몰라서 대학원으로 왔다. 제 꿈을 찾아, 아니면 사회 속의 직장으로 척척 떠나는 친구들을 보며 대단하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원은 제가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어렸을 적부터 하고픈 바가 딱히 없었다. 어른들이 꿈이 무어냐고 물어봤을 때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남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따랐다. 학창 시절엔 해야 하는 일들이 정해져 있어서 편했다. 스스로 무언갈 할 필요도 없었고 딱 주어진 바만 맡아했다. 반장 같은 귀찮은 일은 나서서 하지 않았다. 대학원에 진학한 이유는 무얼 해야 할지 몰랐고, 취업을 해야 하나 싶던 찰나에 교수님의 진학 제안으로 결정해버렸다. 친구들은 이 얘길 장난하지 말라며 처음엔 결사반대를 외치며 말리기도 했지만, 나중에서야 이해를 하진 못했지만 원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며 받아들인 듯했다. 


요즘 한창 전 세계인의 관심사인 올림픽 경기가 한창이다. 그중 우리나라는 양궁에서 두각을 크게 보이는데, 원도 심심하던 찰나에 동생이 보던 TV로 고개를 움직였다. 활시위를 힘껏 당겨 한쪽 눈을 감아 과녁에 조준을 하고 단숨에 화살이 날아가 과녁에 꽂힌다. 노란색 원에만 속속들이 꽂히는 화살 다발들. 가운데를 비집고 계속해서 꽂히는 새 화살들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다. 양궁 단체전의 금메달의 소식을 알리는 순간, 휘황찬란한 자막과 CG가 하단을 장식했다. 적은 "누나, TV 볼 거야?"라며 원을 보고 물었지만, 난 이내 고개를 젓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적도 이어서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누렀다. 


동생인 적이 마라톤 대회에 나간다며 한창 연습을 시작했길래 원도 요즘은 출근할 때에 평소처럼 버스를 타지 않고,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집에 자전거가 없어 아파트 정문 부근에 있는 대여 자전거를 이용한다. 처음엔 페달을 밟는 게 너무 오래되어서 핸들을 이리저리 옮겨 방향을 잡지 못하고 요리조리 움직였지만, 5분이 지나자 정면을 향해 핸들을 꽉 쥐고선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햇빛이 이렇게나 쨍한데도 날리는 머릿결 사이로 스 쳐 지나가는 바람은 제법 상큼했다. 출근 시간에 사람들로 꽉 막힌 버스에서 틀어주는 에어컨보다 더 나았다. 버스로는 2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지만 자전거를 타니 30분 여가 걸렸다. 시간은 조금 더 들였지만 여느 날보다 더 가뿐한 아침이다. 앞으로 자전거를 애용하려고 다짐하지만 원은 그날 기진맥진한 몸으로 버스를 타고 퇴근했다. 


학교 휴가 기간으로 에어컨을 틀어놓고 거실 테이블에 앉아 휴가 기간에 볼 전시회와 공연을 알아보던 순간에 갑자기 벌컥하고 현관문이 열리더니 적이 들어와 바로 리모컨을 들어 공중파에서 중계해주는 양궁 경기를 튼다. 우리나라 선수들의 경기 차례가 아닌 것을 확인하곤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나와 소파에 앉아 경기에 집중한다. 원도 덩달아하던 일을 멈추고 경기를 보기 위해 적을 소파 끝으로 밀어 제 자리를 차지했다. 개인 결승전 경기라 치열했고, 우리나라를 응원하면서도 어쩌면 질 수도 있겠다 생각하였지만, 8점 이상만 쏘면 승리를 확정 짓는 마지막 한 발이 정중앙에 꽂힌 것을 확인한 캐스터가 큰 함성을 지른 후에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CG와 자막이 장식했다. 적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 제 방으로 가며 전화를 걸었다. 아마도 랑에게 전화를 거는 거겠지. 원은 이어지는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서 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양궁이 아니라 정확히 활에.


어떻게 저 먼 과녁까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활시위를 당길 수 있을까. 그리고 곧바로 날아가 정확히 과녁에 꽂히는 화살을 보며 든 생각은 '부럽다'였다. 제 길을 정확히 알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그 모습을 보며 원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그날 원은 침대에 누워 한참을 천장을 바라봤다. 머릿속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렇게 까만 밤의 어둠이 눈에 익숙해질 동안 오랜 시간을 보냈다. 어둔 방의 형태가 눈에 다 들어찬 것도 잠시, 곧이어 밝아온 날에 제 머리를 헝크리곤 밖으로 나가 물 한 컵 마시고, 연달아한 컵을 더 마셨다. 아무래도 어제 양궁 경기를 본 후엔 제 자신이 무언가 바뀐 것 같았다. 가슴속에 형형할 수 없는 불꽃이 자리한 듯했다. 토해낼 수도 없는 불꽃은 타들어갈 듯 뜨거워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뭐든지 해야만 했다. 아침 여섯 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각. 원은 옷을 가볍게 챙겨 입곤 집 밖으로 나섰다. 출근할 때처럼 자전거를 타고 목적지 없는 길을 따라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았다. 평소 장 볼 때 가곤 하는 대형마트를 지나, 산책할 때 가끔 오던 하천길을 따라 달리기도 하고, 달에 한 번씩 오는 시립도서관도 지나쳐 그렇게 달렸다. 그렇게 두 시간을 넘게 달렸다. 우인산의 길을 따라 만든 트랙킹 길 부근에서 멈춘 원은 베란다 밖 창으로 볼 땐 느끼지 못했던 거대함을 느꼈다. 근엄한 자태와 위엄 있는 분위기가 웅장한 떨림을 주었다. 산이 되어야겠다. 아니, 산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이제 원은 물러설 곳도, 돌아갈 순간도 남아있지 않다. 물론, 스스로 돌아가거나 멈출 생각이 없다. 원은 이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 속에서 나아가는 이유를, 목표를 찾을 것이며, 방황하고 후회도 할 것이다. 그러나 원은 이제 결심을 마쳤다. 그토록 미루고 늦추었던 선택을 이젠 마주해야만 한다. 활시위를 당길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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