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단을 바꾸기보다 습관을 줄여보는 연습
서늘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아이들이 잠든 뒤, 텅 빈 거실에 앉아 TV를 켰다. 자연스레 손은 과자 봉지를 향했고, 냉장고 속 아이스크림에 시선이 머물렀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입이 심심했을 뿐이다. ‘오늘도 망했다’는 생각은 늘 다음 날 아침에 찾아왔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고, 몸이 무거워졌다. 평소에 입던 바지가 허리를 조여오고, 옷장 속 원피스는 어느새 먼지만 쌓이고 있었다. 한때 50kg 초반이었던 체중은 어느새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뭔가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방송인 이하정의 SNS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게 됐다. 49kg 복귀, 오이와 당근으로 배를 채웠다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처음엔 그저 연예인의 다이어트 성공담 정도로 넘기려 했다. 하지만 오이, 당근, 방울토마토. 너무나 흔하고 단순한 재료가 조금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오이는 수분 함량이 96%에 달한다. 토마토는 95%, 당근도 90%에 이른다. 이 수치들이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냐면, ‘물 대신 씹는 간식’이라는 새로운 선택지였다. 무턱대고 식사를 줄이면 허기가 너무 심했다. 결국 다시 야식으로 무너졌다. 하지만 오이 한 줄, 당근 한 조각을 씹는 습관을 들이니, 이상하게도 허기가 좀 누그러졌다. 그냥 입에 뭔가를 넣었다는 안도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효과적이었던 건 저녁 9시쯤, 딱 그때였다. 늘 무너지던 시간. 아이들이 잠든 후 조용한 시간에 오이나 방울토마토를 꺼냈다. 포장지도 없는, 바삭하지도 달콤하지도 않은 그 채소들이 그 순간엔 의외로 나를 채워줬다.
식이섬유도 한몫한다. 이들 채소는 물만 많은 게 아니라 식이섬유도 풍부하다. 장에서 부풀고 천천히 소화되며, 배고픔을 덜 느끼게 해준다. 토마토는 10개 이내, 오이와 당근은 각각 하나씩이면 충분하다. 처음엔 이걸로 뭐가 되겠나 싶었지만, 중요한 건 ‘폭식’으로 가지 않게 막는 역할이었다.
이하정은 하루 2리터의 물을 꾸준히 마셨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따라 해봤다. 식사 전에 500mL 정도의 물을 마시는 것부터 시작했다. 캐나다 퀸스대 연구에 따르면, 식전 수분 섭취는 실제로 체중 감량에 효과가 있다. 실험 참가자들은 12주 만에 평균 2kg을 감량했다. 물을 먼저 마신 사람들은 식사량 자체가 줄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실험이 영국에서도 있었다. 아침 식사 전 물을 마신 그룹은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식사량이 22%나 적었다. 나는 이 수치를 외웠다. 22%. 적지 않은 차이다. 하루 한 끼만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그건 내게 충분히 의미 있는 변화였다.
물 500mL를 마시면 약 24kcal가 소모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계산은 단순하다. 하루 두 번, 식전 물 마시기로 48kcal. 한 달이면 1,440kcal. 치킨 한 마리다. 이런 식의 계산이 습관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도 있다. 지나치게 물을 마시면 저나트륨혈증이 생길 수 있다. 혈액 내 나트륨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낮아지는 상태인데, 두통이나 혼란, 심하면 경련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한다. 나는 하루 2L를 넘기지 않도록 설정했다. 물 외에도 과일, 채소로 수분을 채우니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여름은 유난히 배가 자주 고프다. 알고 보면 그건 갈증인 경우가 많다. 우리 몸은 갈증과 허기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땀으로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몸은 뭔가를 더 원하게 되고, 그게 음식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여름에는 더 의식적으로 물을 마셔야 한다. 식사 전에 물 한 컵. 오후 3시쯤 물 한 컵. 잠들기 전 미지근한 물 한 컵. 하루 3번만 꾸준히 챙겨도 몸의 변화가 느껴졌다. 덜 붓고, 덜 지치고, 덜 배고팠다.
이하정처럼 나도 특별한 식단을 하진 않았다. 단지, 물을 의식하고, 채소를 챙겼을 뿐이다. 그걸 하루, 이틀, 일주일 반복했다. 물론 중간에 실패도 있었다. 야식의 유혹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하지만 그런 날이 있어도 괜찮았다. 다음 날, 다시 오이를 꺼내면 되니까.
다이어트를 시작하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건 ‘바꾸려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식단을 몽땅 바꾸고 운동을 무리하게 시작하면, 그건 오래가지 못했다. 대신 줄이는 데 집중했다. 양을 줄이고, 빈도를 줄였다.
특히 간식이 문제였다. 아이들과 함께 먹는 과자, 아이스크림, 떡볶이. 나 혼자만 안 먹겠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타이밍을 바꿨다. 허기를 미리 채워두면, 손이 덜 갔다. 그게 오이 한 개의 힘이었다.
체중이 눈에 띄게 줄기 시작한 건 2주쯤 지났을 때였다. 1~2kg은 ‘변화’라기보다는 ‘회복’에 가까웠고, 그 이후부터가 진짜였다. 3kg을 감량하고 나니 옷이 다시 맞기 시작했다. 거울 속의 나는 똑같았지만, 걸음이 가벼워졌다. 기분이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