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잊은 줄 알았는데, 아직이었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숨어 있었다

by 진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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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들른 거리, 우연히 듣게 된 노래, 손에 쥔 커피잔의 온기 하나에도 그녀가 떠올랐다.
나는 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럴 줄 알았다.
일상도 익숙해졌고, 슬픔도 무뎌졌으며, 그녀의 이름은 더 이상 입에도 오르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 이름 하나를 입에 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어떤 단어가 그녀를 떠올리게 할까, 어떤 장면이 또 나를 무너뜨릴까.
그래서 피하고, 밀어내고, 외면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모든 게 괜찮아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날, 너무도 사소한 장면 하나에서 내가 아직도 그 사람을 잊지 못했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지하철 광고판에 적힌 한 문장이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게 보냈던 말과 너무 닮아 있었다.
“그냥, 여기까지가 맞는 것 같아.”
짧고 조용했던 그 말.


심장이 순간적으로 쿵 내려앉았다.
아무 준비 없이 떠오른 기억은, 그 어떤 장면보다 선명했고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이상할 정도로 그녀가 자주 떠올랐다.
거리에서 스치는 향기 하나, 카페에서 들리는 노래 한 구절, 계절의 색감마저도 그녀를 닮아 있었다.


우리는 여름 끝자락에 처음 만났고, 가을 초입에 헤어졌다.

그래서인지 바람이 선선해지는 시기가 오면, 나는 유독 그녀가 생각났다.

나는 잊은 줄 알았지만, 기억은 생각보다 더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잊었다는 건, 단지 꺼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기억은 내 무의식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어 있다가 틈만 나면 스르르 흘러나왔다.

그녀와 함께 걷던 길, 그녀가 좋아하던 커피 브랜드, 손에 쥐어주던 작은 선물 하나까지.
모든 것이 감정의 버튼처럼 작동했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도, 그 감정은 마음 어딘가에 가만히 눌러 앉아 있었다.
불쑥 떠오른다는 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누구도 묻지 않았지만, 나는 내 마음에게 대답하고 싶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직이었구나.”


그녀는 어떤 기억으로 내게 남았을까.
그녀에게도 나는 이런 감정으로 스쳐가고 있을까.
아니, 이제는 그런 생각도 더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 안의 감정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 잊은 줄 알았던 사람을 다시 떠올린 오늘, 나는 내 감정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건 미련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했던 시간이 남긴 잔향이었다.

사랑이란 게 꼭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 시절의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리고 괜찮다.
사랑했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도, 그 기억을 안고서도 나는 내 삶을 조금씩 잘 살아내고 있으니까.

지금 이 감정이 영원히 남아 있는 건 아닐 거라는 것도 안다.


언젠가 또다시 아무렇지 않게 그 거리와 그 노래를 지나칠 날이 오겠지.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그녀를 떠올린 나를, 그 감정에 잠시 흔들린 나를, 그저 가만히 안아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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