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사계절이 한 번 바뀌고, 또 한 번쯤 더 바뀌었을까.
달력은 제 몫을 다해 날을 넘겼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그 사람을 한 계절에 가둔 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누군가는 벌써 다른 풍경 속에서 웃고 있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그 계절을 잊은 채
앞으로 나아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때의 햇빛과, 바람의 온도, 그녀의 웃음을 기억한다.
그 사람은 지금, 어느 계절쯤에 있을까.
나는 여전히 그 계절 어귀에서, 그 사람의 흔적을 되짚고 있다.
여름이었다.
햇볕이 너무 눈부셔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던 오후.
우리는 바닷가 근처의 작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넘실대는 햇살을 바라보며 말없이 웃었고, 서로를 향한 말은 줄였지만 마음은 오히려 가까워졌다.
그녀는 바람이 불 때마다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겼고,
나는 그 동작이 유난히 예뻐서, 괜히 물 한 모금을 천천히 마시며
그 순간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무더운 날씨도, 느릿한 공기도, 그 사람과 함께라면 다 괜찮았다.
가을이었다.
노랗고 붉게 물든 낙엽이 거리를 덮던 계절.
조금 쌀쌀한 바람이 불던 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익숙한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고, 그날은 유난히 말이 적었지만,
그 침묵마저도 서로를 이해하는 언어처럼 편안했다.
사진도, 기록도 남기지 않았지만 그 골목에서 느꼈던 공기, 걷던 속도, 그녀가 내 옷깃에 손을 살짝 얹던 감촉까지— 모든 것이 아직도 선명하다.
겨울이었다.
첫눈이 온 날, 서로의 연락을 기다리다 결국 만났다.
따뜻한 국물과 김이 서리는 유리창 너머, 그녀는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쥐고 조용히 웃었다.
그녀는 추위를 많이 탔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괜히 장갑이 없다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내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따뜻해졌다.
길거리에서 웃으며 뛰던 순간, 모자를 덮어 씌워주던 손길, 그 해 겨울, 우리는 가장 가까웠다.
그리고 봄.
벚꽃이 피기 시작하던 날, 우리는 공원을 함께 걸었다.
그녀는 꽃이 질까 봐 아쉬워했고, 나는 그 아쉬움을 예쁘다고 생각했다.
가벼운 바람이 불 때마다 흩날리는 연분홍 꽃잎이 그녀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고, 그녀는 웃으며 눈을 감았다.
봄은 짧았지만, 그 짧은 계절 속에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피고 지는 것들이 너무 빠르다며, 우리는 서로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이제는 그녀를 볼 수 없다.
연락할 일도, 마주칠 이유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
계절은 몇 번이고 바뀌었고, 그녀는 아마 나보다 훨씬 멀리, 훨씬 많이 지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을 계절로 기억한다.
햇살이 너무 뜨거워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던 여름날, 붉은 낙엽이 바람에 구겨지던 골목길,
첫눈이 천천히 내려앉던 그 조용한 밤, 벚꽃이 흩날리던 봄의 오후까지.
그 계절들 사이에, 그녀가 있었고 내가 있었다.
기억은 흐려졌지만, 그날의 공기, 표정, 눈빛, 침묵…
그 모든 감정은 장면으로 남아 시간이 흐를수록 더 단단해졌다.
이별은 때로, 끝이 아니라 반복이다.
서서히 옅어지는 감정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몇 번이고 같은 기억을 다시 떠올린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픔만 남지 않았다.
그곳에는 분명 누군가를 깊이 사랑했던 시간, 그 시간의 결이 조용히 눌러 앉아 있었다.
이제는 그녀를 다시 볼 수 없어도, 계절은 여전히 돌고 나는 그 안에서, 조용히 한 사람을 기억한다.
그리고 언젠가 그 계절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 있다면, 그건 그녀를 완전히 잊은 게 아니라—
마침내 내 마음도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