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 없이 떠오르는 장면들
헤어진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울지 않고, 이름을 떠올려도 숨이 가빠지지 않는다.
그 사람 없는 하루에도 익숙해졌고, 계절은 몇 번이나 조용히 바뀌었다.
삶은 여전히 나를 앞세워 흘러가고, 나는 그 흐름 속에서 새로운 얼굴을 만나고,
낯선 대화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중이다.
그래서 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불쑥, 예고 없이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극적인 말도, 마지막 인사도 아닌 그저 일상에 녹아 있던 아주 사소한 순간들이다.
버스 창가에 기대 잠든 그녀의 옆모습.
편의점 앞에서 고른 음료를 건네며 웃던 표정.
햇살을 피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던 모습.
내 옷깃을 괜히 다듬던 손끝.
지하철 플랫폼에서 기차 소음을 피해 살짝 고개를 돌렸을 때, 순간 마주친 눈빛.
그런 장면들이 나를 멈춰 세운다. 그때는 몰랐다.
그 순간이 그렇게 오래 남을 줄은...
모두 너무 평범하고, 특별하지 않아서 그땐 오래 기억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건, 꼭 특별한 사건으로 남지 않는다.
기억을 되짚을수록 더 깊게 남는 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일상의 조각들이다.
말보다 공기, 웃음보다 침묵, 약속보다 눈빛이었다.
그녀가 말없이 보여줬던 다정함이, 그 모든 무언의 언어가 마음 어딘가에 남아 부드럽게 흔든다.
비 오는 날, 그녀는 항상 내 쪽으로 우산을 살짝 기울였다.
나는 그 동작을 별생각 없이 받아들였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안에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건 설명되지 않는 다정함이었다.
길을 걷다 고양이를 발견하면 멈춰서던 사람.
꽃이 피기 시작하면 나보다 먼저 그것을 말해주던 사람.
핸드폰 배경화면을 자주 바꾸며 내게 늘 먼저 보여주던 그 작은 행동들까지도
이제는 내 안에서 소중한 기억이 되어 있다.
그녀와 찍은 사진보다, 그 옆에 있던 공기의 온도가 더 또렷하다.
“사랑해”라는 말보다, 나를 바라보던 눈빛 하나가 더 오래 머문다.
다정했던 말보다, 말 없이 웃어주던 장면이 지금의 나를 더 많이 건드린다.
사랑은 원래 그런 모양인가 보다.
함께했던 수많은 날 중에서도 의외로 가장 오래 남는 건, 무심히 지나친 순간들이라는 것.
그리고 이별은 그 순간들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끝난 뒤에야 알게 된다.
그날의 침묵이 얼마나 편안했는지, 그저 옆에 있어주던 그 사람이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문득 그런 생각이 스며든다.
그날의 웃음이,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건넨 마지막 인사였던 걸까.
손끝에 잠시 머물렀던 온기가 우리가 나눈 마지막 체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끝이라는 건, 언제나 그렇게 온다.
소리 없이, 예고도 없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우리 사이를 건너간다.
우리는 그 끝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이미 지나버린 감정의 어딘가에 멈춰 서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장면들을 더는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시간이 흐른다고, 모든 걸 지울 필요는 없다는 걸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 시절의 나도, 그 사람도—
그 순간만큼은 틀림없이 진심이었다.
생각보다 오래 남는 건 찬란했던 장면이 아니라, 묵묵히 곁을 지켜주던 어떤 날의 정적이었다.
그녀의 웃음이 아니라, 그 웃음이 머물던 오후의 공기였다.
그리고 나는, 그 공기의 결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