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그해 봄은, 공기부터 달랐다.
아직 아침에는 손끝이 조금 시렸고, 점심이 되면 햇살이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강의실 창문으로 들어온 빛은 겨울보다 오래 바닥에 머물렀고, 학생회관 앞 벤치에는 두꺼운 패딩 대신 얇은 가디건이 하나둘 늘어났다.
수업이 끝나면 사람들은 괜히 급하지 않은 얼굴로 걷다가, 잔디밭 가장자리나 계단에 잠깐씩 앉아 시간을 흘려보냈다. 캠퍼스는 아직 완전히 깨어난 건 아닌데, 분명 어제보다 조금 들떠 있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자주 마주쳤다.
처음엔 그냥 여러 명 중 하나였다. 같은 수업을 듣고, 친구의 친구로 같은 자리에 앉고, 단체로 밥을 먹다가 자연스럽게 같은 테이블 끝에 걸리는 사람. 네가 웃으면 다 같이 웃었고, 네가 조용하면 누가 먼저 말을 붙였다. 특별한 사이라기엔 멀었고, 남이라고 하기엔 자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네가 있을 때보다 없을 때 더 먼저 너를 의식하게 됐다.
친구들이 여럿 모인 저녁이었다.
누군가는 과제 얘기를 했고, 누군가는 다음 주 시험을 걱정했고, 누군가는 휴대폰으로 음악을 틀었다.
웃음소리도 컸고, 말도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자리가 조금 비어 보였다. 나는 대화에 맞장구를 치다가도 자꾸 문 쪽을 봤다. 네가 원래 앉던 자리가 비어 있어서였다.
늦는 건지, 안 오는 건지, 별일은 없는 건지.
물어볼 정도는 아닌데 마음은 자꾸 그쪽으로 갔다.
그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야 알았다.
아, 내가 생각보다 더 많이 너를 보고 있었구나.
그 뒤로는 모든 게 조금씩 달라졌다.
수업 시작 전에 강의실에 먼저 들어가도 마음이 먼저 자리를 잡지 못했다.
노트를 펴고 펜을 꺼내놓고도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가 들렸다.
친구랑 떠들다가도 네가 들어오면 잠깐 말이 끊겼고, 네가 내 쪽을 보고 가볍게 손을 들면 괜히 나도 평소보다 늦게 웃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늘 비슷한 말을 했다.
“다음 시간 어디야?”
“오늘 교수님 또 늦으시겠지?”
“과제 했어?”
말은 가벼웠고, 대답도 짧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짧은 대화가 끝나면 그날 하루가 조금 덜 심심했다.
별일 없던 날도 네가 한 번 웃어주면 괜히 모양이 생겼다.
우리는 자주 같이 걷게 됐다.
일부러 약속한 건 아니었다. 수업이 같은 날이 겹치고, 이동하는 건물이 비슷했고, 내려가는 계단이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걷다가도 어느 순간 나란히 걷고 있는 때가 많았다.
네가 먼저 속도를 맞춘 건지, 내가 무의식중에 늦춘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자주 같은 박자로 걸었다.
그때의 나는 그게 너무 좋으면서도 너무 어렵기도 했다.
친구들 앞에서는 멀쩡하게 하던 말이 너 앞에서는 자꾸 어색해졌다.
하고 싶은 말은 분명 있었는데, 막상 입을 열면 늘 무난한 말만 나왔다.
네가 건넨 한마디를 괜히 오래 붙들고 있다가, 집에 가서야 다른 대답이 떠오르는 날도 많았다.
아까는 왜 그렇게 말했지, 조금 더 자연스럽게 웃을 걸,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밤이 늦었다.
그런데 너도 가끔 비슷해 보였다.
사람들이 다 일어나도 한 박자 늦게 가방을 정리한다거나, 이미 들은 얘기를 다시 묻는다거나, 굳이 안 해도 되는 말을 하나 더 꺼내는 순간들.
말끝에서 잠깐 멈추는 표정, 웃고 나서 바로 시선을 내리는 습관 같은 것들.
그때마다 나는 괜히 마음이 커졌다. 혹시 나만 이런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봄이 깊어질수록 캠퍼스는 눈에 띄게 환해졌다.
벚꽃이 피고, 사람들이 사진을 찍느라 자주 멈춰 섰고, 도서관 계단에는 캔커피를 든 학생들이 늘었다. 수업 사이 빈 시간만 생겨도 다들 밖으로 나왔다.
우리도 그중 하나였다.
계단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며 중간고사 얘기, 집 얘기,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계획들을 말했다.
그날 너는 웃으면서 내 말을 듣다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도 따라 조용해졌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가고, 꽃잎 몇 장이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
말해야 할 것 같은 순간이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또 못 할 것 같은 순간.
나는 캔을 손안에서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가, 결국 다른 말을 했다.
시험범위가 어디까지였는지, 내일 수업이 휴강인지, 그런 말. 너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다시 평소처럼 웃었고, 다시 평소처럼 일어났다.
그날 이후로도 우리는 여전히 잘 지냈다.
인사를 했고, 같이 걸었고, 가끔은 마주 앉아 밥도 먹었다. 겉으로 보기엔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건 한 번 타이밍을 놓치면 이상하게 더 조심스러워졌다. 괜찮았던 거리도 갑자기 멀게 느껴지고, 잘하던 농담도 괜히 망설여졌다.
그러는 사이 계절이 먼저 지나갔다.
꽃은 생각보다 빨리 졌고, 캠퍼스 바닥에는 연한 색이 얇게 깔렸다가 며칠 만에 사라졌다.
과제는 늘고 시험은 다가왔고, 우리는 각자 바빠졌다.
여전히 마주치긴 했지만 예전처럼 오래 머무는 날은 줄어들었다.
특별히 멀어진 것도 아닌데, 마음을 꺼낼 기회만 조용히 지나갔다.
어렸고 서툴렀고, 그래서 놓쳤다.
하지만 바로 그 서툼 때문에 그때의 감정은 아직도 닳지 않고 남아 있다.
잘되었더라면 다른 모양으로 기억됐을지도 모를 마음이, 지금은 봄만 오면 다시 살아나는 풋풋한 설렘으로 남았다.
그래서 해마다 비슷한 햇살이 창가에 오래 머무는 날이면, 나는 그해 봄의 우리를 떠올린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는데도 말보다 침묵이 더 많았던 두 사람, 그래도 서로의 하루를 조금씩 밝히고 있었던 두 사람.
끝내 잡지 못한 계절이었지만, 그래서 더 오래 반짝이는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