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 않지만-3-

반 박자 늦은 웃음

by 진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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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회사에서 늘 조금 늦게 웃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걸 조심성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낯가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누군가의 호의에 바로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다. 호의를 빨리 받으면 빚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서.


3월, 새 팀으로 출근하던 첫날도 그랬다.

입사 첫날의 공기는 늘 비슷하다.


낯설고, 민감하고, 다들 친절한데 완전히 편하지는 않은 공기. 환영받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평가받는 느낌. 나는 그런 분위기를 이미 여러 번 겪어본 사람처럼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모니터, 지급 장비, 아직 낯선 이름들이 적힌 조직도. 이런 것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내가 여기서 너무 튀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를 먼저 계산하고 있었다.


그때 장우진이 말을 걸었다.

“지안님 커피 드세요? 여기 근처에 괜찮은 데 있어요.”

너무 빠르지도, 너무 부담스럽지도 않게 건네려는 말투였다.
나는 잠깐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커피 좋아해요.”

짧게 대답했는데, 그 짧은 말조차 내 안에서는 꽤 많은 계산 끝에 나온 것이었다. 너무 무뚝뚝해 보이면 안 되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반가워 보여도 안 된다.

회사에서는 처음부터 선을 잘못 넘으면 나중에 정리하기 어렵다.


우진은 밝은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쉽게 말을 걸고, 어색한 공기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계속 뭔가를 던졌다. 그런 사람은 대체로 팀에서 사랑받는다. 분위기를 만들고, 침묵을 견디지 않게 해주고, 모두가 “아무거나”라고 말할 때 대신 메뉴를 정해준다. 나도 그런 사람이 팀에 있으면 편해진다는 걸 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사람은 내게 어렵다.
너무 잘해주는 사람 앞에서는 내가 어느 정도까지 받아도 되는지 계속 생각해야 하니까.

그 옆에서 서도윤이 말했다.


“지안님, 온보딩 자료는 드라이브에 정리해뒀어요. 필요하면 말씀 주세요.”

그 말은 이상할 정도로 단정했다.
불필요한 친절도 없고, 부담을 주는 따뜻함도 없었다.

그냥 해야 할 말을 정확히 하는 사람의 말투. 나는 그런 말이 편했다. 편해서 오히려 조금 더 오래 기억했다.


“네, 감사합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우진이 웃으며 덧붙였다.

“질문 있으면 저한테도 막 던지세요. 저는 팀의 공식 잡담 담당이라.”

그 말에 나는 웃었다.


정말 웃긴 말이라기보다, 아 저 사람은 진짜 저런 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이구나 싶어서. 그리고 그런 사람은 대개 상처도 잘 받는다는 걸,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내 눈에는 두 사람이 조금 다르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진은 가까이 오는 사람이었다.
커피를 묻고, 점심을 정하고, 퇴근길 조심히 가라는 말을 꼭 덧붙이는 사람. 배려가 말의 형태로 자주 보이는 사람.


도윤은 자리를 만들어주는 사람이었다.

필요한 자료가 미리 정리돼 있고, 내가 회의에서 어디서 말해야 하는지가 자연스럽게 정리돼 있고, 실수할 가능성이 줄어들도록 구조를 먼저 깔아두는 사람.


둘 다 친절했는데, 결이 달랐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에어컨 냄새가 옷깃에 배고, 회사 사람들의 말투는 조금씩 느슨해졌다. 나도 팀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회의에서 한두 문장 더 말했고, 슬랙에 웃는 이모지를 붙였고, “ㅎㅎ” 같은 것도 조금은 더 쉽게 썼다.


하지만 익숙해진다는 건 편해진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회의가 길어질수록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누군가 내 의견을 다시 되묻는 순간 방금 한 말 전체가 틀린 것처럼 느껴졌다. 남들은 잘 모를 만큼 작은 변화겠지만, 내 안에서는 늘 미세한 긴장이 이어지고 있었다.

우진은 내게 자주 농담을 던졌다.

“지안님, 회사에서 제일 위험한 말이 뭔지 아세요? ‘아무거나’예요. 아무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뜻이거든요. 오늘은 제가 책임질게요. 쌀국수 어때요?”

그럴 때마다 나는 웃었다.


웃는 게 편해서가 아니라, 그 웃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아니까. 우진의 말에는 늘 상대의 반응을 바라는 마음이 조금씩 섞여 있었다. 누군가는 그걸 다정함이라고 부를 테고, 누군가는 부담이라고 부를 것이다. 나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자꾸 망설였다.


솔직히 말하면, 우진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건 분명했다. 나를 불편하게 만들 의도로 다가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잘해주고 싶어하는 게 너무 선명해서,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사람의 호의가 선명할수록, 나는 그것을 받아도 되는지 오래 생각하게 된다.

바쁜 날 우진이 “커피?” 하고 물으면 나는 가끔 “오늘은 좀…” 하고 웃었다.
그럴 때마다 우진도 웃으면서 물러났다.

“아~ 오케이. 원래 제가 회사에 커피를 너무 권해요. 나중에 건강검진에서 다 제 탓이라 해도 돼요.”

겉으로는 가볍게 넘어가지만, 그 웃음 뒤에 아주 얇은 실망이 있다는 걸 나는 느꼈다.

느끼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내가 그걸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들키면, 그다음부터는 더 어색해질 테니까.


반대로 도윤은 나를 거의 밀어붙이지 않았다.
말을 걸더라도 업무의 형태였고, 도움이 필요할 때도 “말씀 주세요” 이상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거리감 안에서 더 많이 관찰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감정적으로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순간에 흔들리는지 조용히 기록하는 사람처럼.


회의가 길어지는 날이면 도윤은 꼭 내가 말해야 할 순서를 먼저 정리해줬다.
외부 미팅 전에는 “이 부분은 지안님이 바로 말씀하시면 돼요” 하고 선을 그어줬다. 나는 그게 편했다. 누군가 대신 나를 감싸준다는 느낌보다, 내가 덜 무너지게 바닥을 단단히 깔아주는 느낌이라서.


그러니까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조금 이상한 방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를 향해 선명하게 오는 사람과, 선을 지키면서도 더 깊은 곳을 보고 있는 사람.

그리고 나는 원래, 이런 종류의 흔들림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예전에 누군가를 좋아했던 적이 있다.
그 마음 하나로 생활 전체가 기울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하루의 기분이 답장 한 줄에 매달리고, 일의 집중력이 누군가의 태도 하나에 무너지고, 결국 나 자신이 너무 낯설어지던 시간. 그 뒤로 나는 마음을 통제하는 법부터 배웠다. 적어도 회사에서는 더더욱.


그래서 여름 내내 나는 계속 안전한 쪽을 골랐다.
웃되, 더 가까워지지는 말 것.
고맙되, 기대하지는 말 것.
편해져도, 표현하지는 말 것.

그 균형이 깨진 건 9월이었다.


대형 클라이언트 제안서 마감이 하루 당겨졌고, 팀 전체가 밤을 새우게 됐다.

회의실은 순식간에 전쟁실이 됐다. 화이트보드에 할 일이 빽빽하게 적히고, 컵라면 냄새가 카펫에 배고, 전기포트는 쉬지 않고 끓었다. 밤샘 특유의 이상한 연대감이 생겼다가, 다시 각자의 예민함으로 흩어졌다.


처음 몇 시간은 버틸 만했다.
우진은 이런 날에 특히 빛났다.

“자, 여러분. 오늘 밤 목표는 두 가지입니다. 제안서 끝내기,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기.”

사람들이 피식 웃었다. 나도 웃었다.
그런 농담이 있으면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점점 말을 잃었다.
고객 니즈를 정리하고, 논리를 맞추고, 표현을 다듬는 작업이 반복되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정확히 틀린 건 아닌데, 내가 하고 있는 말이 충분히 설득력 있는지 점점 확신이 사라졌다.

그때 내 안에서 제일 커지는 감정은 늘 비슷하다. ‘내가 이상해 보이면 어떡하지.’
실수보다 그게 더 무섭다.

새벽 1시쯤, 결국 나는 복도로 나갔다.


물 마시러 간 척했지만 사실은 숨을 고르러 나간 거였다.

회사 건물 복도 끝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생각보다 더 지쳐 보여서, 나는 잠깐 이마를 손으로 눌렀다.

그때 뒤에서 도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안님.”

나는 놀라서 돌아봤다.

“아, 도윤님… 그냥 잠깐…”

도윤은 내게 “괜찮아요?”라고 묻지 않았다.
대신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제안서에서 ‘왜 우리냐’가 흔들려요.

지안님 정리한 니즈는 정확한데, 그걸 말로 꿰는 과정에서 힘이 빠졌어요.”

순간 이상하게 숨이 조금 돌아왔다.
내가 무너지는 걸 감정으로 읽어주는 게 아니라, 일의 언어로 받아주는 방식이 편했다.

나는 그 틈에서 겨우 말을 꺼냈다.

“저… 제가 말하면, 이상할까 봐…”

말하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무서운 건 피곤함도, 마감도 아니었다. ‘이상해 보이는 것’. 능력이 없어 보이는 것.

어설픈 사람으로 읽히는 것. 나는 늘 그걸 두려워했다.

도윤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지안님이 ‘잘한다’는 기준은 뭐예요?”

나는 대답하지 못하다가 겨우 말했다.

“실수 안 하는 거요. 빈틈 안 보이는 거.”

도윤의 대답은 짧았다.

“그 기준이면, 사람은 다 불합격이에요.”

그 말에 나는 정말 조금 웃었다.
위로라기보다 허락 같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지금 당장 탈락하지는 않는다는 허락.

우리는 다시 회의실로 들어왔고, 도윤은 전기포트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종이컵을 하나 내 쪽으로 밀어줬다.


새벽 3시쯤 자동등이 한 번 꺼졌다 켜졌다. 짧은 어둠이 지나고 다시 불이 들어왔을 때, 나는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고, 도윤은 내 말을 그냥 듣고 있었다.

끼어들지 않고, 쉽게 정리하지도 않고, 내가 말의 모양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얼굴.

나는 그 순간 이상하게 많이 안심했다.
누군가 앞에서 실수하지 않아도 되는 기분이 들었다.

바로 그때 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쿠, 저기 분위기 뭐예요. 둘이만 무슨 비밀 얘기해요? 나도 껴줘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흠칫했고, 종이컵에서 손을 뗐다. 회의실 몇몇 사람이 우리 쪽을 봤다.

갑자기 내가 아주 사적인 장면을 들킨 사람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는 그런 일이 아니었는데도.

도윤이 먼저 말했다.

“그냥… 지안님 좀 힘들어 보여서요.”

그러자 우진이 웃으며 말했다.

“어어, 나도요. 나도 힘든 사람 위로 엄청 잘합니다. 공식 잡담 담당이니까.”

그 말이 왜 그렇게 아프게 들렸는지, 나는 아직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우진은 평소처럼 농담을 한 것뿐인데, 그날은 그 농담 안에 서운함이 너무 선명했다.

그리고 나는 그 서운함까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제일 안전한 말을 했다.

“괜찮아요, 우진님. 저 진짜 괜찮아요.”

그 말은 우진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었고, 동시에 상황을 빨리 정리하기 위한 말이었고, 어쩌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회사에서는 결국 다들 괜찮아야 하니까. 적어도 겉으로는.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우진의 표정이 아주 잠깐 무너지는 걸 나는 봤다.

“오케이. 괜찮으면 다행이죠. 그럼 일이나 합시다. 우리 다 같이 괜찮아져야 하니까.”

그날 이후 나는 우진을 볼 때마다 조금 미안해졌다.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니라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분명히 누군가의 마음을 밀어낸 사람처럼 느껴졌다. 우

진은 여전히 밝았지만, 그 밝음은 어딘가 더 커져 있었다. 사람은 상처를 감추려 할 때 가끔 더 환해진다.

나는 그걸 알았다.


새벽 5시쯤 제안서가 거의 끝났을 때, 내가 하품을 참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리자 도윤이 말했다.

“사람이잖아요. 그럴 수 있죠.”

그 말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괜찮다는 말보다, 더 숨 쉬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늘 ‘괜찮아야 한다’는 쪽으로 버텨왔는데, 그 말은 ‘그렇지 않아도 인간으로 남을 수 있다’는 뜻처럼 들렸다.


프로젝트 이후로 관계는 천천히 바뀌었다.

도윤과 나는 점심을 자주 같이 먹게 됐다.
업무 얘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간이 맞았고, 같이 커피를 사러 나가는 일도 늘었다.

우진도 자주 같이 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일부러 더 밝게 말했다.


“와, 오늘 커피 삼각형 완성. 이게 회사 로맨스의 시작인가요?”

사람들은 웃었다. 나도 웃었다.
하지만 내 웃음은 늘 반 박자 늦었다. 그 늦음은 우진도 아마 느꼈을 것이다.

나는 우진을 상처 주고 싶지 않았고, 동시에 우진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가까워질 수는 없었다.

그 둘 사이에서 자꾸 표정이 늦어졌다.


반면 도윤과 있을 때는 이상하게 말이 길어졌다.
거창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회의에서 왜 그런 말을 못 했는지, 어떤 부분에서 자꾸 긴장하는지, 내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엄격한지. 그런 것들을, 전에는 굳이 말하지 않던 것들을 조금씩 말하게 됐다.


도윤은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기다렸다. 내가 말을 찾을 때까지. 누군가의 침묵을 조급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게 얼마나 드문지, 나는 그때 알았다.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더 분명하게 느꼈다.
우진의 호의는 여전히 내게 닿고 있었고, 그 호의가 틀린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다정했다.

하지만 그 다정함은 내게 자꾸 “어떻게 돌려줘야 하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도윤의 배려는 달랐다.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보다, 그 앞에서는 조금 덜 완벽해도 된다는 기분이 먼저 들었다.

그 차이가 결국 마음의 방향을 만들었다.

어느 날 우진이 내게 말했다.

“지안님, 올해 고생 많았죠. 우리… 연말에 술 한잔 할래요? 그냥, 얘기 좀… 하게.”

그 순간 나는 아주 짧게 망설였다.


우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를 만큼 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걸 정확히 확인하는 순간, 우진과 나 사이의 공기가 완전히 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가장 부드러운 보류를 택했다.

“좋아요. 근데… 우진님, 저 요즘 좀 정신이 없어서요. 날짜는… 나중에 잡아도 될까요?”

나중에.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하게 들릴 수 있는지 알면서도 나는 그 말을 했다.

지금 당장 선을 긋는 것보다 덜 아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아닐 수도 있는데도.

그날 밤 나는 집에 가는 길에 계속 생각했다.
내가 우진에게 너무 오래 애매한 친절을 돌려준 건 아닐까. 웃고, 받아주고, 모르는 척하면서 결국 희망을 남겨둔 건 아닐까. 상대가 괜찮은 사람이어서 더 미안해지는 종류의 관계가 있다. 우진이 그랬다.

며칠 뒤, 나는 도윤에게 슬랙을 보냈다.

[도윤님, 혹시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회의실 문을 닫고도 한참 말을 못 했다.
도윤은 재촉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 덕분에 겨우 말할 수 있었다.

“저… 요즘 제가 왜 이렇게 힘든지 잘 모르겠어요.”

도윤은 바로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지안님은요, 힘들면 보통 어떻게 하세요?”

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냥… 더 잘하려고 해요.”

말하고 나서야, 그게 내 문제의 핵심이라는 걸 알았다.
흔들릴수록 더 잘하려고 하고, 더 잘하려 할수록 더 긴장하고, 긴장이 커질수록 더 혼자가 된다.

나는 늘 그런 식으로 버텨왔다.


도윤이 말했다.

“그럼 오늘은 ‘더 잘하기’ 말고, ‘그냥 말하기’만 해봐요. 뭐가 제일 무서운지.”

나는 테이블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

“제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제 생활이 통째로 흔들렸던 적이 있어요. 그래서 회사에서는 더…”

끝까지 말하지 못했지만, 도윤은 알아들은 얼굴이었다.
그게 오히려 나를 더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이해받는 순간, 사람은 더 약해진다. 더 숨길 수 없게 되니까.

며칠 뒤 퇴근 시간이 겹쳤고, 나는 먼저 말했다.

“도윤님, 오늘… 조금 걸을래요?”

회사 건물을 나와 지하철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겨울 공기가 차가웠다.

사람들은 각자 집으로 바쁘게 향했지만, 우리는 이상하게 서두르지 않았다.


나는 말했다.

“그날… 밤샘하던 날 있잖아요. 그때 도윤님이 해준 말, 계속 생각났어요.”

도윤이 물었다.

“어떤 말이요?”

나는 웃었다.

“사람이잖아요. 그럴 수 있죠.”

그 말을 다시 입에 올리는 순간, 나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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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윤에게 기대고 싶었던 건 답이 아니라 허락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 무너지지 않는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

도윤은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

“지안님이 편한 속도로 가요. 저는… 그 속도 맞출게요.”

그 말은 고백도 아니고, 약속도 아니고, 관계의 이름을 정하는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그 말이 제일 진실하게 들렸다.

서두르지 않겠다는 마음. 내 불안을 존중하겠다는 마음. 누군가에게 그런 태도를 받는 건 처음이었다.

그 순간에도 우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크게 웃던 얼굴, 농담 뒤에 얇게 남던 상처, 괜찮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하던 표정. 나는 누구의 마음도 밟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은 늘 누군가를 지나 다른 누군가에게 가는 동안, 의도치 않게 흔적을 남긴다.


나는 아직도 내가 좋은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회사에서 감정을 배제하며 살 수 있다고 믿었던 건 착각이었다는 것.

감정을 없앨 수는 없고, 결국 해야 하는 건 견디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어쩌면, 견디는 끝에서야
누구를 향해 조금 더 오래 머무르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 마음의 이름을 나는 아직 정확히 붙이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안다.


누군가의 큰 농담보다,
누군가의 조용한 기다림이
나를 더 멀리 흔들 수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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