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버거운 날
세상이 버거운 날에는
나는 자꾸 고개를 숙이고 걷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힘이 다 빠진 그림자처럼
밤길 위를 오래 떠돌다 보면
저 멀리
나를 기다리는 한 사람이 있다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날에도
아무도 내 마음을 믿어주지 않는 날에도
그 사람만은 이상하리만치 태연하게
내가 좋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이
처음엔 잘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쉬이 지치고
이렇게 자주 무너지는 나를
좋아할 이유가 세상에 있을까 싶어서
그런데도 그 사람은
내 어깨에 가만히 기대어
자기 하루를 천천히 꺼내놓는다.
누구에게나 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
꼭 내게만 들려주고 싶은 것처럼
사소한 웃음과 작은 한숨들까지
빠짐없이 내 앞에 내려놓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안다
적어도 이 사람에게만큼은
나는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대충 스쳐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오늘을 털어놓고 싶어지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어떤 밤은
위로보다 그 믿음이 먼저 나를 울린다
나조차 나를 좋아하지 못하는 날
나조차 내 편이 되어주지 못하는 날
그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내 곁에 앉아
내 지친 얼굴을 못 본 척
괜히 다른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다
마치 세상이 무너진 건 별일 아니라는 듯
내가 조금 늦게 웃어도 괜찮다는 듯
포기 같은 건
아직 내 차례가 아니라는 듯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몇 번이고 오늘을 건넜다
무너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너져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끝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힘없이 걷는 모든 밤 끝에는
언제나 그 사람이 서 있다
나를 다 안아주지는 못해도
나를 다 고치지는 못해도
그저 내가 돌아갈 수 있도록
한 자리를 오래 비워둔 채
기다리는 사람
어쩌면 사랑은
대단한 약속이 아니라
그 기다림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아도
아무도 나를 믿지 않아도
끝끝내
내 편이 되어주는 한 사람
나는 그 사람을 생각하면
조금 늦게라도
다시 살아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