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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성문 Mar 19. 2022

사랑. 네가 제일 나빠 #2

이비인후과 선생님이 아내의 상태와 조직검사 방법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의사 선생님에게 아내의 상태와 회복 가능성을 물어보았다. 의사 선생님 말은 조직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암세포가 어떤 타입인지 얼마나 공격적인지 얼마나 온순한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직검사는 오후 6시 30분부터 시작되었다. 쇄골 밑에 근육을 째고 암세포조직을 떼어내는 수술이 진행되었다. 20~30분이면 끝날줄 알았는데  1시간 20분이 넘게 진행되었다.

수술실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수술이 잘되어지길, 그리고 조직검사 결과가 좋게 나오기를 기도했다. 대기실 모니터에 수술 종료를 알리는 메시지가 뜨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전신마취 후 80분이 넘는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는 쉴 곳이 없었다. 마취가 깨자마자 아내는 침대에서 다시 쫓겨났다. 전신마취 후 한 시간이 넘는 수술을 한 환자에게 앉아서 대기하라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녁이 되면서 응급실 전체가 어수선 해졌다. 병원 관계자들이 갑자기 병실 구석구석을 닦기 시작했다. 금방까지도 마음대로 출입하던 모든 문이 통제되었고, 환자도 보호자도 나갈 수 없었다. 메르스 의심환자가 다녀갔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자정이 지나자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환자에 대한 격리를 풀어주지 않았다. 보호자는 자유롭게 나갈 수 있었지만 환자들은 응급실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아내가 갑갑할까 봐 아내를 휠체어에 태우고 좁은 응급실을 계속 돌았다. 사람들이 빠져나가 한산해진 틈을타 의자 세 개를 붙여 아내를 눕혔다. 그것이 지금 내가 아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렇게 응급실에서 또 하루가 지났다.


오늘은 중요한 검사가 두 개나 예정되어 있다. 하나는 암이 골수로 침입했는지를 확인하는 골수검사이고, 또 하나는 림프암의 전체적 진행도를 알 수 있는 PET CT 검사다. 골수검사가 많이 아프다던데 아내가 잘 참을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오전에 골수검사가 진행되었다. 나는 아내가 아파 비명을 지를까 봐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는 안 아프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얼마나 많이 아팠을까? 간간히 아내의 아픈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그때마다 나는 더 세게 귀를 막았다. 골수검사 후 지혈을 위해 몇 시간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는 호강을 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내는 다시 침대 밖으로 내쫓겼다.


다시 응급실 감옥생활이 시작되었다. 죽어가는 사람, 소리치며 우는 사람 , 계속 구토하는 사람, 아수라장 속에서 아내는 잠을 잘 수도 깨어있을 수도 없었다. 응급실에 환자 식사가 따로 나오는 게 아니어서 나와 아내는 편의점에서 파는 인스턴트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아내에게 밥 같은 밥을 먹이고 싶었다. 병원 지하에 food cort를 들어가 봤다. 여러 메뉴 중 해물순두부 찌개를 보는 순간 난 아내에게 이걸 먹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혹시나 해서 점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포장되나요? '  포장이 된단다. 감사하게 순두부찌개 만찬을 하고 또 하룻밤을 버티어냈다.

 
사람은 적응에 동물인가 보다. 응급실에 벌써 적응해버렸지 중간에 깨지도 않고 잘 잤다. 오늘은 특별한 검사도 없어서 응급실에서 잘 버티기만 하면 됐다. 점심때쯤 우리는 새로운 의사 선생님에게 우리가 처한 부당한 상황을 토로했다. 그리고 끝내 나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아내는 기뻐했다. 이로써 장장 사흘에 걸친 응급실 감금에서 풀려난 것이다. 아내와 나는 병원 밖에 나가 산책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사 먹으며 시간을 보내고 자유? 를 만끽했다.


입원 대기자 순번을 틈만 나면 원무과에 물어보았다. 아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원무과 직원이 짜증 날 정도로 물어보았다. 다행히 그들도 우리가 안쓰러웠는지 한 번도 짜증 내지 않았다. 첫날 대기 18번 에서 3일째 저녁에 대기 3번이 되었다. 응급실 최고참인 우리의 의자 침대는 이제 의자 6개를 붙여 만든 더블침대 가이 되었다.

(메르스 때문에 신규 환자를 받지 않아 응급실은 한산해져 있었다)

저녁 6시쯤 원무과에서 연락이 왔다. 원무과 직원은 1인실 하나가 비어있는데 들어갈의향이 있는지 나에게 물어보았다. 1인실 입원비는 하루 약 50만 원, 한번 들어가면 최소 이틀 이상 있어야 한단다. 어찌할지 고민하는 나에게 아내가 결정을 내려주었다. 하루만 더 참아 보겠다고 했다. 아내도 하루 50만 원 하는 입원비가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우리가 다시 할 일은 또 응급실 밖을 방황하는 것이었다. 입원실 하나만 달라고 기도했지만 며칠째 입원실은 나오지 않았다. 3일이 지난 후에 원무과 직원에게 전화가 왔다. 저녁 9시쯤 병실이 날 것 같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입원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쁠 줄이야! 입원실은 밤 10시가 돼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입원실이 없다 보니 본관 병동에 임시로 마련한 입원실이었다. 나는 입원실에 짐을 옮기고 장인어른과 교대하고 전주로 내려왔다. 원래 나는 휴직을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장인 장모가 말리셨다. 치료에는 돈도 필요하고 또 휴직 때문에 내가 회사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걱정되셨나 보다.


6일 만에 집에 간다. 고속버스는 휴게소에도 들르지 않고 2시간 만에 전주에 도착했다. 전주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집 앞에 내렸다. 새벽 1시 40분! 집에 들어가도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교회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내를 살려달라고 밤새 기도했다.   


목욕탕에 가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아 집에서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을 했다. 물소리 때문이었는지 우리 딸이 방문을 빼꼼히 열고는 아빠~ 하고 외쳤다. 며칠 만에 보는 건지. 너무 귀엽다. 아들도 깨어난 후 아빠가 온 걸 알고 나에게 달려온다. 귀여운 내 새끼들... 우리 쌍둥이를 위해서라도 아내를 무조건 살려야 했다. 나는 다시 교회에 가서 기도했다.  새벽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의 기도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캄캄한 교회 강대상 왼편에서 누군가 기도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저곳에서 기도할 사람은 뻔하다. 엄마였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교회에서 기도했다. 교회에서 집으로 와 아이들과 눈물의 이별을 한 후 서울로 올라왔다.


펠로우 선생님으로부터 조직검사 결과를 들었다. 임파 암중 비홉 킨스 T세포 림프종이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안 좋은 경우다. 하지만 다행히 암세포가 골수에도 침입하지 않았고 복부 밑으로도 전이되지 않았다고 다. 아내도 T세포 림프종이 다른 종류보다 예우가 좋지 않다는 말에 불안해하는 눈빛이다.  아내가 의사 선생님에게 치료하면 살 수 있는가를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조직검사 결과가 나온 오늘부터 바로 항암치료에 들어간단다. 암세포가 다른 곳으로 더 침투하기 전에 빨리 치료하는 것이 좋다고 결정이 난 것 같았다.  담당 선생님들이 오셔서 항암 일정과 부작용 등에 관해 설명해 주셨다. 총 5개월 동안 A, B타입 치료를 각 3번씩 반복하는 것이다.


치료 일정이지만 치료가 시작되니 희망이 배가 되는 것 같았다. 약이 주렁주렁 매달리기 시작했다 4개의 약이 동시에 아내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투약 속도를 조절하는 기계를 달고 있어서 아내는 이동에 제약을 받았다. 많은 양에 약물이 들어가서인지 화장실 가는 횟수가 많이 늘었다. 새벽 한 시에도, 두시에도 아내가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면 깨어나 도와주어야 했다. 사실 혼자 할 수도 있었지만 아내는 나를 귀찮게 하려고 하는 것보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동이 불편한 아내를 씻겨줄 요랑으로 편의점에서 대야를 샀다. 대야에 물을 떠서 양치도 시키고 발도 씻겨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항암 첫날을 경험했다.

항암 둘째 날이다. 간밤에 아내가 소변을 보고 싶어 해서 네다섯 번 깬 것 같다. 아직까지는 식사도 잘하고 에너지도 있어 보인다. 아내 목욕을 시켜주었다 독 한약을 주입하려고 몸에 카테터를 꼽고 있어서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최대한 방어막을 친 후 타월로 몸을 씻겨주었다.


저녁 8시쯤 혈액종양내과에 입원실이 났다는 연락이 왔다. 암병동은 새 로진 건물이고 아무래도 교수님이 계신 과로 이동하는 것이 훨씬 좋으니 참 잘된 일이었다. 암병동 입원실은 사이즈부터가 달랐다 본관보다 1.5배는 큰 것 같았다. 냉장고도 따로 있었다. 한참 동안 짐을 정리하고 쉬려는데 옆에 환자가 좀 이상하다. 날카로운 애기 목소리로 쉬지 않고 보호자에게 불평한다. 정신과 약을 먹는다는 걸로 보아 마음도 아픈 사람인가 보다. 불쌍했다. 하지만 옆에서 같이 병실을 써야 하는 우리로서는 정말 참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간호사님이 오시더니 우리가 병실을 옮겨야 한단다. 왜? 거의 한 시간 동안 짐을 정리했는데 다시 옮기라니. 이유인즉슨 메르스 문제로 격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며칠이 지났는데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지금 와서 다시 옮기란 건지! 하지만 방법은 앖었다. 가라면 갈 수밖에.


옮긴 곳은 1인실이었다 전망도 좋고 모든 것이 2인 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곳은 하루 80만 원짜리 특실이었다. 참! 메르스 덕분에 특실에서 자보게 생겼다.

어제저녁 특실로 긴급격리(?) 된 후 한밤이 지났다. 2인 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방에서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다. 우리가 이곳에 격리된 이유는 우리가 메르스 확진환자가 있었던 5월 29일쯤 응급실에 메르스 환자와 같은 공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내가 치료 도중 37.6도의 미열이 발생 생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급작스럽게 많은 일을 겪으면서 아내는 어제보다 쉽게 울고, 쉽게 두려워했다.

아내가 밥 먹기를 힘들어했다. 반찬 냄새가 많이 역한가 보다. 대충 국물에 밥을 말아서 넘기는 수준이다. 단백질을 보충해줘야는데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메르스로 격리된 내가 지난주 회사에 다녀간 일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나에 동선을 물었고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여기저기서 나를 메르스 세균덩어리로 취급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급기야는 엄마로부터 아이들이 학교로부터 퇴교조치되었음을 알리는 전화가 왔다. 과한 조치였지만 옭은 조치였기에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불안해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내가 하루 동안 전주에 가 있었던 것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쫓겨나 집 밖으로 못 나가게 되었고, 회사 우리 팀은 격리 조치되었다. 아이들이 자택격리되었단 소식에 아내는 속이 많이 상해했다. 사실 메르스에 가장 취약한 건 아내였다. 항암치료로 백혈구 수치가 떨어져 있기 때문에 발병하면 큰일이었다.


아내는 좀 더 불안해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고 힘들어했다. 하루에 두 번씩 전주보건소와 질병관리본부 콜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오후 5시쯤 아내의 A타입 전반기 약 투여가 끝났다. 아내는 자유로운 몸 이되었고, 덩달아 나도 많이 자유로워졌다. 


아내가 항암 후유증으로 입이 아프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못 먹는데 큰일이다. 다행히 오늘 아침부터 식욕 촉진제를 준다. 이런 게 있다니 참 신기하다. 점심에는 치즈 돈가스를 사다 주니 좀 먹는다. 다행이다. 아내는 자신에 상황을 잊기 위해선지 TV를 보거나 잠을 잤다 거의 다른 일은 하지 않는다. 아침에는 많이 지루했는지 오목을 두잔다. 세트 스코어 2대 1로 졌다. 역시 머리 쓰는 일은 아내한테 얀 된다. 교수님이 댜녀 가셨다. 아내 갸 언제쯤 집에 갈 수 있냐고 물었다. 교수님은 아내의 병이 백혈병과 거의 유사한 병으로 백혈병과 같은 약을 투약한다고 길게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백혈병이란 소리에 아내는 또 민감하게 뱐응하기 시작했다. 아내를 안심시킬 요량은 로 백혈병에 완치율을 설명하면서 달래고 다독였다. 조금 안심하는 눈치다. 식욕촉진제가 약발을 발휘하나 보다. 저녁으로 본관 지하 식당까지 가서 사 온 양송이 수프와 탕수육을 잘도 먹는다. 맛있단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단백질을 섭취하니다 행이다. 격리가 해제되면 먹고 싶은걸 더 많이 사다 줄 수 있을 텐데...


뉴스는 온통 메르스 일색이다. 이제 확진자가 100명이 넘었단다. 오늘도 무사하길 기도할 따름이다. 벌써 저녁 9시, 여기서는 시간이 정말 빨리 간다. 밥 먹고 쉬 고를 3번 반복하면 하루가 끝난다.


드디어 메르스 잠복기 마지막 날이다. 어제부터 나는 많이 신경질적이 되었었다. 혹시 증상이 나올까 봐서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목만 잠겨도 불안하고 아내 체온이 37도만 넘어가도 불안감이 몰려왔다. 14번 환자가 2주 전에 병원을 나간 오후 7시 이후가 지나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왜 이렇게 늦게 가는지...


아내의 백혈구 수치가 조금 올랐다. 아직 정상까지는 한참 멀었다. B타입 항암치료를 제때에 진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약간 오른 백혈구 때문인지 아내의 컨디션이 훨씬 좋아 보인다. 잎 아픈 것도 좀 괜찮은지 오늘은 우유도 먹는다. 참 다행이다.


아내가 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누워있다. 허리 통증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간호사를 부르고 주치의를 불렀다.
(옆방인가? 곡소리가 들린다. 죽었나? 아내가 자고 있어 다행이다.) 통증이 심한가 보다. 허리 통증 때문에
자세를 이리저리 바꿔보지만 통증이 사라지지 않는 듯 눈에 눈물이 맺혀있다. 간호사에게 진통제를 요청했다.
멀쩡했는데 갑자기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리고 신경이 무뎌지다니 안 좋은 생각이 들며 불안하다. 하나님 이 정도면 되지 않았나요? 여기서 또 뭘 더하실 게 있나요? 원망이 터져 나왔다.

주치의가 준약이 효과가 있는가 보다. 아내는 통증이 조금 약해진 틈을 타 잠이 들었다. 부디 자고 일어난 후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일어나길 기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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