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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인간에게 불어넣는 것

극사실주의에 대한 고찰

by 서본

인간은 여느 동물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인간의 DNA는 침팬지와 99%, 오랑우탄과 97%가량 일치한다. 이처럼 유전적 거리가 멀지 않은 영장류들이 도구를 이용하고 육아를 하는 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게 느껴지며 과연 인간만이 특별하고 고유한 존재인가 의문을 품게 한다.


‘인간이라는 동물’을 관찰하다 보면, 그저 주어진 환경에 맞춰 적응하고 진화하는 보통의 종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어쩌면 생명체 중 가장 여리고 나약한 종이 운이 좋아 지구를 평정하게 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 드넓은 지구에 이렇게 셀 수 없는 종류의 생명체 중 나는 무슨 연유로 인간으로 태어났을까? 양재천을 걷다가 까치, 청둥오리, 버들나무를 보며 그들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세상은 어떨까 생각하곤 했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아주 오랜 역사 동안 주위의 자원을 이용해 인간 중심적인 세계를 구축해 왔다. 같은 지구에 사는 생명체로서, 인간과 다른 종이 차별화 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일까?


무엇이 인간을 그토록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것일까?

하이퍼리얼리즘, 김영성 작가의 작품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술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극사실주의 작품을 좋아한다. 작품이 사진을 옮겨다 놓은 것 같을수록 더욱 인상 깊게 느껴진다. 실재하는 형상 같아서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는데, 현실과 허상을 구분하지 못해 생기는 인지적 혼란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혹자는 극사실주의 작품은 사진과 다를 바 없으므로 가치성이 떨어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작품을 작품으로서만 평가하는, 예술의 객체의 입장에 불과하다. 작품을 창작하는 주체의 입장에 서본다면, ’인간이라는 동물‘의 손에서 이토록 섬세하고 신비로운 창작물이 탄생하는 것이 경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지구상 어떤 생명체가 이토록 정교하고 세밀한 행위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초등교육과(미술과)에 재학 중이다. 나에게 미술이란 아주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취미, 학교를 들어가면서는 가끔씩 나를 환기할 수 있는 예체능 과목, 입시를 시작하고서는 외면하고 억눌렀던 욕망이었다. 인생의 부차적인 요소로 전락할 줄만 알았던 미술에 이처럼 많은 시간을 쏟게 된 시기는 처음이었다.


첫 미술 과제, 구멍을 표현

드로잉 기법 수업 중 처음으로 부여된 과제였다. 도화지와 연필로 그림을 그린 지는 꽤 오랜만이었다. 교수님께 인정받을 만큼 잘 그리고 싶어 그림에 열중하다 보니, 약 1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수업이 끝나고 얼굴에서는 열이 났다.


도넛 모양의 겉과 속으로 갈수록 그림자가 져 색이 짙어지는 것과, 빛이 반사되는 부분을 살려놓는 것, 안에서 바깥으로 선들이 둥글게 표현되는 것 등에 집중했다. 특히 시선의 방향에 따라 원의 위쪽 부분은 곡률을 크게, 아래쪽 부분은 곡률을 작게 표현하였다.


인물화, 배우 한지민의 화보

먹지처럼 원본의 사진 뒷장을 4B연필로 까맣게 칠해 선을 딴 후 그린 인물화이다. 총 5시간가량의 시간이 걸렸고, HB/B/4B 총 3개의 연필과 휴지, 지우개로 명암을 표현하였다.


머리카락, 두상, 눈썹, 눈동자, 쌍꺼풀, 속눈썹, 콧대, 콧볼, 콧구멍, 인중, 입술선, 입꼬리, 턱선, 귓불과 귀걸이, 목선, 쇄골, 어깨선과 주름진 옷 등…

아주 세밀한 부분의 명암까지 관찰하고 표현하려 노력했다.


위의 과제들을 수행하면서 보람을 느꼈지만, 자꾸만 피어나는 완벽주의에 괴롭기도 했다. 선의 길이와 각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인물의 인상이 변해서 수정을 반복하느라 작업을 끝마치기 어려웠다. 이 작은 얼굴에서도 빛의 반사는 어찌나 다양하던지, 사진을 복사하는 수준으로 종이에 옮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극사실주의 작가들은 작은 붓 수십 자루를 사용해, 3~6개월 정도의 기간을 거쳐 작품을 완성한다고 한다. 인고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작품들은 사진보다 더한 생동감을 드러내며 시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들의 작품 속 부드러운 머릿결, 촉촉한 눈동자와 온기가 느껴질 듯한 피부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고화질로 포착한 것만 같다. 우주 속 먼지 같은 존재가 이처럼 마법 같은 일을 해내는 것은 마치 신의 손을 빌린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단지 환경이나 유전적 변화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우리를 더 똑똑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개인의 지성보다 인류의 집단적 문화이다.”


영국의 과학저술가, 가이아 빈스의 <초월> 中


예술은 인간을 다른 어떤 생명체와도 차별화하고, 선택받은 종(種)으로서의 인간이 고유한 가치를 지니도록 하는 길이다. 창작의 주체로서, 그리고 세계를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감상의 주체로서, 인간은 보다 특별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던 것이다.



출처: https://journal.kiso.or.kr/?p=10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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