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보고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트루먼 쇼>의 짐 캐리와 <타이타닉>의 케이트 윈슬렛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이다. 눈 오는 겨울날, 달리는 기차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영화 초반부의 배경이 비슷해서 더 몰입이 되었다. 영화를 보며 트루먼 쇼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 조정하는 세상 속에서 도망치는 조엘과 클레먼타인의 모습을 보면서였다.
전체적인 전개는 과거 회상을 기반으로 한다. 연인에게 상처받은 기억의 고통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아예 삭제해 버리는 비현실적인 내용을 다루는 판타지 영화인데, 단순한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상처 난 기억을 지우는 것이 결과적으로 옳은 일일까?
상처받은 기억들을 지우면, 찌들은 어른의 마음이 순수하고 희망찬 태초의 마음처럼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영화에 등장한 명제였다. 하지만 그럴듯한 말들은 정말 그럴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점 없는 수녀의 삶은 얼마나 행복한가!
세상을 잊고, 세상으로부터 잊히니.
순결한 정신의 영원한 햇빛!
모든 기도를 받아들이고, 모든 바람을 체념하니.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207~210행
영화에 등장한 알렉산더 포프의 시이다. 영화의 제목도 여기에서 차용했다고 한다. 결점이 없다고 함은 결점을 망각한 상태라는 뜻일 것이다. 세상을 잊고, 세상으로부터 잊힌다는 것은 나 혼자만이 세상을 잊는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분명 존재했던 그 시공간과 사건, 즉 세상도 나를 잊는다는 것이다.
흠이 없는 상태인 태초의 순결한 정신, 그 영원한 햇빛은 알렉산더의 시에서 완전무결해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영원한 햇빛은 역설적이게도 긍정적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흠이 되는 기억을 삭제한다고 과연 그 사람이 결점 없는 사람이 될까? 자신이 기억하는 한에서야 그렇게 믿을 수 있지만, 믿음과 실재하는 현실은 다르다. 또한 그 사람의 본능과 감정이 살아있는 한, 앞으로의 나날들에 한치의 결점도 없을 거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인간은 끊임없이 실수하고 실패하고 방황하기 마련이다. 그 누구도 상처로부터 완벽한 인간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불가항력에서 벗어나려 하는 인간은 필히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망각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프리드리히 니체-
영화에 등장한 니체의 경구이다. 그는 망각은 인간의 삶에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새로운 기억 생성을 위한 기반이라고 본다. 나 또한 오래된 기억들은 자연스레 흐릿해짐을 느낀다. 과거의 감정과 시공간, 내 삶에 머물렀던 그들의 얼굴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고 언젠가는 떠올리려는 노력 또한 자연스레 사라질지 모른다.
니체가 말하는 망각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연적인 추진력을 의미한다. 가라앉지 않고 매번 새로워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복일 수 있겠다. 과거 ’어린 나‘의 수많은 오류와 실수들에 얽매여 미래를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들이 많으니까… 나 또한 그중 하나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기억을 삭제하는 시술은 인위적이었고, 인위적인 행위는 부작용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감정은 남아있고, 그의 기반이 되었던 기억이 사라지며 클레멘타인은 극심한 혼란을 겪고 불안에 빠진다. 또한, 사건에 얽힌 여러 인물들의 기억이 모두 지워지지 않는 이상 그 사건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 오는 괴리도 인물 간 갈등을 조장할 수 있다. 극 중 메리는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이다.
영화는 기억을 지운다고 해도 내면의 근본적인 감정과 본능을 지울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서로의 단점과 치부를 알면서도 다시 사랑하기로 하는 두 사람을 통해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데에서 온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인간으로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과정에서도 필수적이다. 과거의 부끄러운 날들을 그저 망각하는 것은 근본적 해결이 아닐 수 있다. 가끔은 과거의 패인을 분석하는 것이 새로운 시도에 도움이 될 때가 있고, 어린 날들의 반추는 앞으로의 나를 성숙게 한다. 스스로의 미숙함과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이를 정면돌파하는 용기 있는 삶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기억을 지우기로 한 선택조차 불완전한 ‘인간’의 선택이었다.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중 시술을 멈추려고 도망 다니는 조엘과, 시술 후에 괴로워하는 두 사람을 통해 기억을 지우는 것은 삶의 고통에 대한 근본적 해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눈길을 같이 걷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모습이 반복 재생되는데, 마치 그들의 사랑이 무슨 일이 있어도 영원히 반복될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때 흘러나오는 OST의 전주가 백예린의 노래를 떠올리게 했는데, 놀랍게도 그 가사가 영화의 내용과 맞아떨어졌다.
<Mr. gloomy>, 백예린
백예린의 Mr. gloomy의 가사는 마치 클레멘타인이 조엘에게 하는 얘기 같다. 특히 (클레멘타인의) 부츠와, 당신의 기억에서 잊히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는 부분이 그렇다. 영화를 본 독자들은 백예린의 노래를 들으며, 두 작품 간 상호텍스트성을 느껴보면 좋을 것 같다.
<이터널 선샤인>의 OST
Everybody’s Gotta Learn Sometimes-Beck
Mr. gloomy-백예린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용기 있는 삶들을 응원하며, 두 음악 영상으로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