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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많았던 5월, 지하철을 기다리며

by 서본

무감정이 언젠가부터 만연한 일상이 되었다

가끔 인터넷을 하다 보면 옛날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설레던 들뜨던 나의 마음을 흔들어놓던

글들, 음악, 영상들을 마주하면 기분이 묘하다

예전만큼 훅 치고 강하게 들어오는 자극은 아니지만

나를 그 시절로 살짝이라도 밀어 넣는 그 느낌은

기분이 좋으면서도 씁쓸하다


내가 언제 이렇게 변해버린 건지

고등학교 1학년이 시작되면서 그때 그 춥고 시리게 파랗던 겨울부터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같이 있어도 외롭고 고독했고 생각이 참 많았다

이게 원래 나인지 변한 나인지 알 수 없었지만 변화는 분명했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바로 사춘기인가 싶기도 하다


어릴 적 나는 참 말이 많았다 인정욕구가 강해서 그랬던지 매년 매 학기 회장선거에 나갔고 친구들을 이끌며 노는 것을 좋아하였다


선생님의 물음에 다들 조용할 때 나서서 이야기하는 것도 망설임이 없었다 친구들과 놀 때도 계산하는 것 없이 하고 싶은 말을 잔뜩 했었는데 나를 반에서 가장 웃긴 아이라고들 했었고 나 또한 몸속 깊숙한 곳부터 웃음을 뽑아내곤 했다


지금 나는 흥미가 없다 재미가 없다

나는 위로와 치유에 관심이 있다 자극은 피로할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영화, 영상 모두 나를 안정되게 하는 것들이다


12년간의 학창 시절을 거치며 나의 이미지는 어느새 차분하고 성실한 학생의 모습이 되었다

남의 일에 나서면 오지랖이 넓은 것이고 과한 친절을 보이면 계산적인 성격인 것이며 적극적인 모습들은 나대는 행동으로 조용히 치부되었다


부모님과 사회가 좋은 학군의 이과생에게 원하는 것은

자기 할 일에만 집중하여 최상의 성적을 이끌어내어 내로라하는 직업을 가지는 것이었고

나는 그에 암묵적으로 순응하였다


감정동요가 없어진 것은 나의 노력 때문일까?

4년간의 수험생활동안 나는 웃음도 눈물도 많이 참았다 울면 눈이 건조해서 졸려 일부러 참았었다는 한 국어 선생님의 말에 동감하곤 했다 한번 터진 웃음과 눈물은 참을 수 없이 흘러나왔고 이는 지난 시간 억눌렀던 감정의 분출같이 느껴졌다


매일 같은 하루,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했어야 마땅한 수험생활에서 특별한 자극은 찾아볼 수 없었고

나는 무감정에 익숙해졌다 그게 당연하고 옳은 삶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같이 오랜 수험생활을 겪은 친구도 이 현상에 공감하였다

이는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것인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어떠한 자극에도 무뎌지고 무의미함을 느끼는 것인가?

나는 의도적으로 어른이 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기로 했다


예를 들면, 나의 흥미를 돋우는 취미를 억지로 탐구해 낸다던가 사소한 것에 크게 웃음 짓는 것이다

노래와 그림, 피아노와 기타를 배우고 싶어지고 햇빛에 비치는 연두색 이파리들에 행복을 느끼고 아빠의 농담에 크게 웃는다


그래도 나는 일상 속 간간히 느껴지는 이 공허함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내가 사회의 잉여인간이 되어가는 이 느낌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고 내가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는 느낌

누군가의 인생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

투명인간이 되어가는 이 느낌이 참 외롭다


나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오늘 대학교 커뮤니티 게시판의 한 글에서 공감되는 구절을 보았다


초등학교 기간제 교사를 하면서 임용고시 재수 준비를 하는데 그 이유를 묻는 글이었다

답글 중 가장 추천수가 높은 내용이 ‘리프레쉬(refresh) 겸 자존감 회복’이었고 나는 내 선택의 이유를 다시금 느꼈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과외 알바를 하는 것을 싫어하신다 나는 지금 건강회복을 해야 하는데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는 게 첫 번째 이유이고, 반수준비를 다시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이 두 번째 이유이다 부모님은 내가 과외를 하는 이유가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신다


나는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과외를 직접 구하고 학부모를 상대하고 초등학생과 교감하고 처음 누군가를 긴 시간 가르쳐보고 매시간 수업 준비를 하면서 내가 사회 속에서 무언가라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나를 위로했다


계속된 목표의 좌절에 나는 절망했고

나의 능력의 한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내 기대보다 발휘를 못한 나의 잠재력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였고 과외 알바는 자아실현의 수단이 되었다


지금은 과외 알바의 고충도 충분히 느끼고 있다

남의 주머니에서 돈 빼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나는 내 예상보다 더 완벽주의였고 더 열심히였고 학부모의 요구사항은 매번 늘어갔다


일상에서의 무감정을 극복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빙의글이 백몇 편이어도 시간이 늦는 줄 모르고 정주행 했던 그때

좋아하던 아이돌의 영상이 뜨면 너무 행복했던 그때

좋아하던 드라마를 정시부터 보려고 집으로 뛰어왔던 그때

노래방 입구서부터 들리도록 친구들과 열창하던 그때가 생각나지만


그때 그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그때처럼 진정하게 웃고 웃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보다 지나간 사람들이 참 많이 그립다

이름만 봐도 설렜던 친구들이 생각난다

참 많이 좋아했고 같이 웃고 장난치고 춤추던 친구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가끔 내 생각을 하는지 내 이름은 기억이 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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