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칠흑, 흐릿, 몽롱한 밤의 기억
첫사랑이라할 수 있을지 모르는 누군가의 소심하지만 세심한 사랑 기억의 색
#칠흑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그건 나에게 그 어떤 기대도 없었다는 뜻이다. 지난여름 학교 중창단 행사를 도왔을 때처럼 막을 올리고 조명을 켜고 다시 끄고,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을 움직이는 의도가 있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안에 등 돌린 한 개의 동 뒤에 있는 놀이터는 아무런 준비 없이 함께 앉아 있던 준비 없는 무대였다. 세 사람 정도가 편하게 앉을 수 있고 넷까지도 가능해 보이는 길고 좁은 벤치에 한 자리까지는 아니고 반 자리라 해야 할까, 그 정도 사이를 두고 앉아서 앞에 보이는 불빛을 함께 보며 얘기를 건네고 주고받고 있었다. 아파트 한 개의 동에 띄엄띄엄 켜있는 불 빛을 바라보며 하나의 얘기, 불 한 칸 건너 보며 또 다른 얘기, 그렇게 불빛 사이 선을 이어가며, 얘기를 이어가며 함께라는 시간을 이어갔다.
"파바박" 실제로 그런 소기가 났는지 상상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나에게 있어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소리와 함께 전봇대 변압기에서 불꽃이 터지는 것으로 남아있다. 이후 모든 감각을 100퍼센트 차단하는 완벽한 어둠으로 이동했다. 사진기의 플래시가 터지는 것과 같이 순간적인 섬광이 비쳤다가 이내 곧 칠흑으로 빠진 거라 그런지 실제보다 더 앞이 안 보이고 눈 안쪽에 잔상으로 남은 섬광의 형태만 붉게 떠다니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안 한 걸까 아니면 그 순간 강한 빛으로 인해 눈뿐만 아니라 귀에도 암막 같은 커튼이 쳐진 걸까, 아무 말도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건 어쩌면 어떠한 신호이거나 있을 수 있는 어떤 선지자의 말과 같은 계시가 아닐까 그는 생각했다. 적막을 깨는 소리는 앞으로 영원히 머릿속 붉은 섬광 안에서 삶의 순간과 함께 꺼지지 않고 밝게 비추며 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 소중한 말을 이어야만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 어디.. 있어..?" 이 말은 아직도 그녀 마음에 밝게 타고 있을까, 바로 옆에 있는 걸 알면서 어디 있는지는 왜 물은 걸까, 늘 준비 없이 일어나고 행동과 말을 드러내는 순간은 계획 없이 던져지게 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싶었다. 그녀가 아직도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지, 더 멀어졌는지 혹은 가까이 왔는지, 놀란 마음에 그의 곁으로 흠칫 다가 온건 아닐까, 그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그의 마음 안으로? 아니면 더 멀어진 걸까.
어둠과 함께 막혀버린 귀는 그 대답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의 마음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 섬광이 번쩍하는 순간 동그란 핀 조명 안에 함께 들어있는 놀란 눈과 하지만 웃음을 머금은 두 개의 얼굴이 비친 모습을, 그는 그려보았고 그리고 기억한다. 그거면 되었다. 사랑하고 싶은 친구, 1막 끝, 조명 아웃, 커튼 다운.
#흐릿
갑자기 굵어진 빗줄기를 탓할 수는 없었다. 손에 들고 있는 커다란 그림 판넬을 탓할 수도 없었다. 작은 우산이 힘겹게 기울어져 있고 다른 한 손에, 정확히는 한 팔에 미끄러지지 않게 간신히 잡고 있는 판넬을 무거워하는 내가 있었다. 하지만 힘겨워하는 몸을 스스로 붙잡고 서있게 하려면 그 어느 것도 탓하면 안 되었다. 그 마음이 비집고 들어오는 순간 모든 걸 손에서 놓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음 또한.
언제였던가 흘리며 얘기한 그 말을 기억하기 위해, 확인하기 위해 여러 차례 간직하며 시간을 기다리며 준비한 선물, 그런데 왜 오늘이었을까, 지하철 역에서 집에까지 가는 10여분 걸어가는 길에 빗줄기는 점차 굵어졌다. 사실 그 빗방울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지가 되지 않고 있었다. 길 건너 모습이 눈에 들어왔을 때까지는. 찻길 폭이 왕복 4차로에 주차구역까지 해서 못해도 30미터, 앞서 있는 정도가 다시 30미터 정도, 그러니까 직선으로는 30 곱하기 루트 2.. 즉, 42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누군가와 우산을 함께 쓰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뛰는 심장을 달래기 위해 애써 피타고라스를 소환해 보기도 했으나, 그 이론은 틀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그 거리가 심리적인 상태가 더해지면서 당시에는 더 가까이, 이후의 기억에는 멀어지는 소실점으로 기억되었다. 멀어지는 건 나의 마음이었을 텐데, 아니 그녀의 마음이었을까.
그 구도와 거리를 이어가며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 마치 영화 촬영장 세트처럼 비는 내 머리 위에서만 내리 붓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우산 밖으로 손을, 발을, 머리를 내밀어 보기도 했다. 그래 어쩌면 연출된 장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이 장면을 마무리 지어야만 하는 숙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은 각본 연출 연기 모두 한 명에게 주어진 역할이었으나 다만 그는 관객만 되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몰입하고 싶지 않았다. 주저앉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찌할까. 이것이 판타지 장르라면 그는 얼른 뛰어가 쫓아가서 판넬을 건네고 다시 오던 길을 돌아서 뛰어간다. 슬픈 사랑의 얘기라면 빗물에 그냥 골목길에 판넬을 세워두고 우산을 접고 집에 들어간다. 만약 집에 들어가서 젖은 빗물을 잘 닦아서 다음날 준다면 이건 어떤 장르라고 해야 할까, 그건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몽롱한 밤의 기억
술 한 잔의 기운 탓일까, 밀착된 거리로 붙어 앉아있어 그런 걸까. 지나치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멀리서 가까이서 보이는 뿌옇게 번진 간판들의 불빛들이 빠른 배속으로 지나쳐가고 있었다. 정지된 시간 속에 나는 그녀와 함께 앉아있었다.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시간의 흐름 느낌 때문일까 바로 앞 1미터 거리에서 다른 공간에 있는 듯했다. 화면 밖과 같다고 할까.
발갛게 상기된 얼굴, 촉촉한 듯 초점을 잃은 눈동자, 낯설게 길게 서있는 간판 앞의 차가운 돌계단에 앉아 있어서일까, 우리의 손은 살포시 포개어져 있었다. 나의 얇은 차가운 손바닥이 그녀의 부드러운 하얀 손 등을 완전하게 덮고 있었다. 차갑다, 아니 나 자신 말고 다른 어떤 살아있는 누군가를 처음 접해보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따뜻한 그 손을 차갑게, 아니 신선하게, 아니 새롭게 여겨졌다. 한동안 말없이 앞을,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분주한 발길을 바라보다 깊은숨을 내쉬며 검은 푸릇한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 소리에 혹은 움직임에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같이 바라보는 밤하늘, 나는 곧 내 얼굴을 돌려 그 얼굴을 또 바라보았다.
무한대와 극한(리미트)을 배운 적 있는가, 어떠한 사이의 거리를 반으로 줄여나가면 점점 더 가까워지지만 극한의 개념으로 보면 0으로 수렴은 하지만 계속 그 거리는 존재하는 상황, 하지만 여기에 오류는 시간이다. 시간을 대입하면 그 시간 동안 그 거리를 지나쳐 갈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그녀 사이에 그 시간이 임하였던 걸까, 마침내 입술이 닿았고 입술을 느꼈고 술에 취한 듯한 거리의 몽롱함은 촉촉한 눈과 핑 돌아가는 머릿속에서 그 어지러움을 더해갔다. 그녀와의 역사는 이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