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울지 마!!

#엄마 없는 졸업식

by 꿈꾸는 냥이

오랜만에 가족 톡방에 글을 썼다. 동생들에게 이번 추석 일정을 묻기 위함이었다. 질문을 던져놓고 미용실에 갔다. 1달에 한 번 숙제처럼 돌아오는 뿌리 염색을 하는 날이었다. 흰머리가 제법 보였다. 엄마를 닮았다면 흰머리가 날 때가 아닌데, 머리카락이 아빠를 닮았다.


거울 앞에 앉으며 부재중 전화가 온 걸 알았다. '엄마'였다.


'엄마..'


아빠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 엄마 번호를 사용하신다. 나와 동생들은 '엄마'로 저장된 이름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엄마에게서 전화를 받는다. 너무 좋은데, 너무 슬프다. 슬퍼도 그냥 그대로 둔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받으셨다. 전화기 너머 아빠 목소리가 슬프다.


"아빠, 울어? 무슨 일 있어?"


"수고했다." 우는 소리가 이어진다. 울보 아빠.


"아빠가 도움도 못줬는데, 수고했어."


"뭘 도와줘~ 울지 마~~!!"


가끔 자주 아빠 때문에 나까지 운다. 눈물도 아빠를 닮았다.


아빠는 우리 가족 톡방에서 내 프로필을 보셨나 보다. 학위 수여식 날 찍은 사진을 보시곤 엄마 생각이 나셨겠지. '아빠가 울보라 나도 울본가.' 울다가 웃었다. 큰일이네.





대학원에 입학 한 건 엄마가 항암을 시작하고 5개월이 지날 무렵이었다. 5학기를 마치면 졸업이다. 엄마가 췌장암이란 걸 알았을 때에도, 대학원에 입학했던 그날도, 학위수여식 날 엄마가 없을 거라곤 생각 못했다.


엄마와 함께 하면 더 좋았을 날이 되면 엄마가 없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엄마는 항상 나를 '최고'라고 생각하셨다. 내가 약속 시간에 꼭 조금씩 늦는다고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속상해할 때도 엄마는 "네가 너무 똑똑해서 그래"라고 하셨다. 너무 똑똑해서 시간 계산을 너무 딱 맞게 해서 1,2분 늦게 된다고 하신 파워도치맘 국정자 여사.


엄마는 가을 무렵부터 너무 많이 아프셨다. 항암을 중단해야 했고, 장기가 급격히 약해졌다. 마지막으로 고향에 다녀온 후로 엄마는 음식을 못 드셨다. 장이 좁아졌다고 했다. 일주일 정도 입원에서 잘 풀어서 나가보자고 했지만, 엄마는 그렇게 2달을 병원에 계시다 돌아가셨다.


물도 마실 수 없는 상태로 수액과 진통제로 살아가는 엄마는 많이 아프다고 했다. 진통제를 맞아도 바로 앉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어야 했던 엄마에게 철없는 나는 나 힘든 얘기를 쏟아놓곤 했다. 엄마가 곧 돌아가신다는 걸 모른 채 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통증이 점점 더 심해져서 마약성 진통제의 용량을 계속 늘여야 했다. 정신이 흐려지기 전까지 엄마는 내 걱정을 가장 많이 했다고 한다. 어느 날부터 엄마는 멍하게 앉아서 손가락을 반복해 움직이셨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엄마는 꿈속에서 무얼 하고 계셨을까. 행복한 기억 안에 계셨길 바랬다.


돌아가시기 5년 전 엄마는 우리 집 근처로 이사하셨다. 일하느라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는 딸을 돕겠다는 엄마의 결정을 아빠는 따라 주셨다. 엄마는 우리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던 그 5년이 정말 행복했다고 하셨다.


좋은 모습만 보여드려야 했는데, 나이만 먹은 철없는 딸은 힘들 때마다 엄마에게 숨김이 없었다. 위로받고 싶었던 마음만 가득했다. 엄마는 힘들어하는 딸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셔야 했다. 우리 집에 다녀오면 걱정으로 잡을 못 주무셨다고 한다. '나 때문에 엄마가 아파진 걸까?' 하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은 대학원 기말고사 날이었다. 코로나가 극심해서 환자 1명에 보호자 1명만 면회가 가능했다. 일주일 동안 아빠 혼자 병실을 지켰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아빠는 준비하라는 통보를 받으셨다. 아빠의 전화. 빨리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코로나 음성 판정을 받고 나서야 병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서둘러 검사를 받고, 오후 3시쯤 결과가 나왔다. 문자를 받자 마자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내 손엔 노트북과 시험공부를 위한 자료가 들어 있는 가방이 들려있었다. 엄마 옆에서 온라인으로 시험을 보겠다고 생각했던 걸 보면 나는 그날도 엄마가 내 곁을 떠날 거란 걸 믿지 않았던 것 같다.


급히 아빠에게 연락을 하며 뛰어 올라갔다. 엄마는 1인실로 옮겨져 있었다. 엄마는 아기 같았다. 152센티미터의 작은 키에 항암으로 몸무개를 35킬로 남짓 했다. 두 달 동안 물도 마시지 못한 엄마는 깃털처럼 가벼워져 있었다.


"엄마~ 엄마~ 나 다인이. 내 목소리 들려?" 엄마를 불렀다. 엄마 딸 왔다고 들리냐고 물었다. 기계에 묶여 있는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숨만 쉬셨다. 엄마를 부르고 또 불렀다. 돌아오는 건 힘든 숨소리뿐이었다.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코로나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 동생네 가족은 우리 아이들과 함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가 곧 돌아가실지 모르는데 아빠와 나만 있어야 한다니 가슴이 답답했다. 사정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그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못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너희들 부모님 돌아가실 때도 똑같이 당해봐라!!'


간호사 두 명이 들어오더니 기계를 확인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동생들에게 연락하라고 했다. 남동생에게 전화를 하니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중인 듯 숨소리가 거칠었다. 지하철역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승훈아, 엄마한테 인사해."


"엄마! 엄마! 나 가고 있어! 엄마, 사랑해!"


동생이 울고, 나도 울었다.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 폰으로 동생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다 듣고 있었나 보다. 엄마 눈에 눈물이 고여 흘러내렸다. 우리는 다 함께 모이지 못하고 그렇게 다른 장소에서 엄마와 인사를 나눴다. 기계가 꺼지고, 나는 엄마를 안고 울었다. 엄마는 오랫동안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엄마는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속상해하실까, 안심하실까? "잘했다!"라고 말씀해 주실까?


처서가 지나니 밤바람이 꽤 차다. 집에서도 카디건을 찾게 된다. 너무 아파하던 엄마 생각이 나는 가을이 되어서일까.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엄마 생각에 자주 눈물이 난다.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