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가방, 찢어진 구두^^

by 홍승표

“이 구두를 번갈아 신을 테니 닦아놓아요.”

1980년대 말, 새로 부임한 임사빈 지사가 구두 한 켤레를 비서실에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새것이 아니라 오래 신은 구두였지요. 지사는 두 켤레의 구두를 번갈아 신었는데, 가끔 낡은 구두창을 바꿔야 했습니다.

“이 구두가 지사님 구두 맞아요? 구두를 바꿀 때가 한참 지난 것 같아서 그럽니다.”

도청에서 구두를 닦고 수선하는 사람이 ‘검소한 것도 좋지만 사회적 체통이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요.


“지사님! 구두 닦는 사람이 구두가 낡았다며 지사님 구두가 맞느냐고 하는데 이참에 새로 하나 장만하시죠?”

“그래? 물 안 들어오면 되지 뭐.”

후임 이재창 지사는 엘리트입니다. 서울법대를 나와 행정고시에 합격 후, 내무부에서 일했고, 인천직할시장을 거쳐 경기도지사로 부임했지요. 강직하고 꼼꼼한 성격에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첨부된 서류까지 꼼꼼히 살피면서 결재하기 때문에 직원들이 긴장할 수밖에 없었지요. 공관까지 서류를 갖고 와 밤늦도록 검토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아침에 공관으로 가서 모시고 저녁에 다시 공관으로 모시면서 종일 지사를 보좌하는 게 저의 임무였지요. 그런데 지사의 가방이 너무 오래된 데다 터질 듯이 서류가 가득 들어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실·국장과 많은 도청 직원이 가방을 바꾸라고 권유했지요. 하지만 “아직 불편하지 않다” 면서 “당분간 바꿀 생각이 없다.”는 지사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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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사 생신날, 부지사가 십시일반 국장들이 마련한 선물이라며 반강제(?)로 새 가방을 안겨드렸지요. 하지만 지사는 과한 선물이라며 극구 사양했습니다. 일단 비서실에서 보관하기로 했지요. 그런데 지사의 생신인 그날 오후,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점심 후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지사가 카폰으로 출입기자와 통화하게 된 게 발단이었습니다.


부지사에게 얘기를 들은 모 국장이 자기 주머니에서 분담한 게 아니라 국 주무과장에게 분담비용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겁니다. 그러자 주무과장이 이를 국 서무에게 과(課) 공통경비에서 마련하라고 한 것이지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직원이 도청출입 기자에게 제보했고, 기자가 확인을 위해 지사에게 전화를 한 것입니다. 한바탕 시끄러웠지요. 가방은 백화점으로 돌아갔고, 부지사와 그 국장은 졸지에 역적(?)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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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청문회 때 후보자가 들고 온 낡은 가방이 화제가 된 적이 있지요. 갈색의 큰 가죽가방은 옆면이 다 해져 희끄무레했고, 손잡이는 닳아서 누렇게 변색돼 있었습니다. 훗날, 청와대에 들어가 일하다가 불명예스럽게 물러나긴 했지만, 이때만 해도 검소함과 청렴의 상징처럼 보였지요. 지난 총선에서도 한 정당의 대표가 비서실을 통해 공개된 ‘선거 지원유세로 굽이 떨어졌다는 구두' 사진을 공개해 ‘연출’아니냐는 갑론을박이 벌어졌습니다. ‘찢어진 구두와 낡은 가방’ 같은 서민 코스프레(cospre)는 이젠 식상한 일이지요.


이들의 가방과 신발은 임사빈 지사나 이재창 지사의 그것과는 결이 다릅니다. 세상이 달라져서 거지도 낡은 가방이나 해진 신발은 거들떠보지 않는데, 가난을 흉내 낸다고 가난뱅이가 되나요. 오히려 이들은 재산이 상당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고, 아무리 보여주기 용도나 선거용이라 하더라도 자연스럽지 않아 보입니다. 낡은 가방을 들었다고, 해진 신발을 신었다고 서민이 되지 않지요. 수십억 재산을 모은 정치인이 흙 수저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의 인성을 의심하게 됩디다. 서민의 낡은 가방, 해진 신발을 벗게 해주는 게 참 정치인이 할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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