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입니다. 많은 이들이 휴가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들떠 있지요. 성급한 사람들은 일찌감치 휴가를 떠났다가 물 폭탄을 맞고 혼비백산 지옥의 휴가를 끝마쳤다고 합니다. 휴가철이면 태풍이나 장마가 연례행사처럼 닥쳐와 휴가가 중지되곤 하니 서둘러 일찍 휴가를 가는 것도 나름 현명한 선택이지요. 저도 가까운 분이 휴가를 떠났다가 물벼락을 맞고 발이 묶였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 아닌 걱정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서둘러서 되는 일 없다는 말을 타산지석으로 삼기로 했지요.
휴가를 일찍 다녀오면 여름 한철이 그렇게 지루할 수가 없습니다. 한 여름 희망이 사라지는 거지요. 먼저 떠날 때는 좋았지만 다녀오면 떠나는 다른 사람들이 부럽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비교적 늦게 휴가를 즐기는 편이지요. 남들보다 더위를 많이 타는 것도 있고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는 기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다른 버릇도 있는데 휴가 땐 수염을 깎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아내는 지저분하다며 손사래 치며 난리지만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런 핀잔은 넘기는 편이지요.
사실 매일 아침마다 수염 깎는 일 그거 보통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 아닙니다. 수염을 깎지 않는 게 느긋하고 그렇게 편할 수가 없지요. 쏠쏠한 재미마저 느껴집니다. 엄밀히 양반 체면으로 보면 그리 점잖은 일은 못되지요. 며칠만 그대로 두면 산적나라 영의정 같은 것이 볼썽사나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어떻습니까. 편하면 그만이지요. 본디 휴가란 것이 일상의 버거운 짐을 벗고 찌든 삶의 더께를 씻는 그런 게 아닌가요.
몇 년 전 제주도로 여름휴가를 다녀왔습니다. 갑자기 결정된 휴가라서 여행사에 부탁해서 숙소와 대여차를 준비했지요. 공항에 내렸더니 어느 기사분이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예순이 넘어 보이는 나이 지긋한 분이셨는데 첫 인상이 무뚝뚝해보였지요. 그분과 사흘 동안을 밤낮 없이 함께 돌아다녔는데 지나치리만큼 고분고분하고 친절했습니다. 휴가를 끝내고 공항에 도착해서야 그분 아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았지요.
사흘 동안을 너무 친절히 잘 해주셔서 봉사료를 드리고 혹시 서울 오시면 수원에 들르시라며 명함을 건넸습니다. 그 유명한 수원갈비를 대접하겠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기사분이 한동안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뭔가 잘못 됐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하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요. 그런데 그 기사분이 웃음보를 터트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웃으시더니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해진 저에게 비명처럼 한마디를 던지더군요. “예끼 이 양반아! 그동안 폭력배인줄 알고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제발 그 수염 좀 깎고 다녀요. 알고 보니 점잖은 양반이.” 그분의 말을 듣고 나서 아내와 함께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제주도 여름휴가는 그렇게 한바탕 웃음으로 막을 내렸지요.
휴가철입니다. 올해도 수염을 깎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래야 매일 아침 면도칼에 난도질당하던 수염도 한시름 놓을 테니까요. 올 여름 휴가기간 중엔 수염 한 번 길러 보세요. 세상 마음이 편해지고 휴가기간 내내 여유로움이 넘칠 것입니다. 올 여름에는 많은 분들이 수염은 매일 깎는 것만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