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ee Sujin
May 13. 2024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나 꼽으라면 응당 먹고 사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가족들의 끼니를 책임지는 주부의 걱정도 늘 한가지이다. 오늘은 뭘 먹지? 그 시절 형편이 녹록치 않던 어머니들 마음에도, 오늘날 솜씨가 변변치 않은 엄마들의 머릿속에도 같은 고민이 떠나지 않는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집안 살림에는 도통 흥미가 없는 날라리 엄마도 아침 저녁 메뉴 걱정을 피할 방도는 없다. 더욱이 쌀밥을 주식으로 하는 한식은 기본이 되는 밥 이외에도 밑반찬 서너가지에 메인 요리 하나는 있어야 한다. 그 뿐이랴, 집집마다 국이나 찌개가 있어야 밥 한술 목구멍에 넘기는 분들이 한 두분씩 계시니 한 끼 식사에 챙길 것이 많기도 하다.
매 끼당 차려내는 음식의 가짓 수도 많지만 선택지도 많다. 산지와 평야가 발달하고 바다에도 인접한 지형 탓에 산에서 나는 나물이며 버섯 외에도 농산물, 수산물 식자재가 다양하다. 사계절이 뚜렷한 탓에 철마다 챙겨 먹어야 할 제철음식이란 것도 존재한다. 조리법도 다양해서 굽고, 튀기고, 볶고, 삶고, 숙성하고, 절이고, 데치고, 무치고.. 말로 다 하기 벅찰 지경이다. 이 많은 선택지 중에 끼니마다 무엇을 내놓을지를 고르는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를 선택하는 것 이상이면 이상이지 그 이하는 아니다. 이런 고심 끝에 선택한 메뉴가 가족 구성원 모두의 입맛에도 맞으면 감사할 일이다.
오늘은 같이 산지 16년 째인 집안 세대주의 생일이라 메뉴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다행이다. 세대주 생일 상엔 소고기 미역국과 흰 쌀밥, 잘익은 김장 김치, 삼색 나물 외에 생일 당사자가 좋아하는 불고기와 한국인 잔칫상 단골 메뉴인 잡채가 오른다. 잡채는 면요리로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도 있으니 생일 상에 꼭 올리는 편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봄날이 한창인 4월이라 데친 두릅을 종종 준비한다. 내외가 둘 다 두릅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몇 해 전, 강원도 산자락 시골 장터에서 사다 데쳐 먹은 후 두릅 맛을 알게 되었다. 이제 진짜 어른 입맛이 된 거라며 웃었던 기억도 난다.
한국인 생일 상에 가장 중요한 음식은 누가 뭐래도 미역국이다. 엄마 뱃 속에 있다 처음 세상에 나온 순간 어미 젖을 통해 처음 먹는 음식이었지 않는가. 소고기를 가장 보편적으로 함께 끓이지만 지역에 따라 닭고기나, 황태, 가자미, 홍합, 바지락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요즘엔 시대가 좋아져 전복이나 성게알 등 귀한 재료를 함께 넣어 끓여내기도 한다지만 우리집 세대주는 소고기와 미역을 참기름에 달달 볶아 뽀얗게 끓여낸 소고기 미역국을 가장 즐겨한다.
가장 친숙하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좋아하는 국이지만 제대로 된 맛을 내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다. 소고기와 미역 달랑 두 가지 재료로 맛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조리한 음식 맛에 자신없을 때는 보통 한 가지 맛이 너무 튄다거나, 아무 맛도 잘 나지 않을 때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소량의 설탕이나 매실액 양파 등을 넣으면 맛에 조화가 생기고 살짝 달큰한 맛이 미각을 달래주는 듯 해서 좋다. 후자의 경우에는 보통 소금이나 후추를 넣는데, 소금은 각 재료 본연의 맛을 끌어 올리고, 후추는 미각을 깨우는 역할을 한다. 물론 순전히 내 생각이다. 안타깝게도 미역국은 이 모든 재료들이 허락되지 않는다. 더욱이 내 개인적 취향으로 흔히들 넣는 마늘도 향이 너무 세서 넣질 않는다. 합성 조미료는 집에 두고 쓰지 않으니 이럴 때는 한탄스럽기 그지 없다.
그래서 미역국을 끓일 국거리용 고기와 미역은 여느 때보다 신중하게 고른다. 미역국은 오래 끓여야 하기에 보통 전 날 밤부터 끓이기 시작한다. 씻어 불린 미역에 참기름, 국간장 두르고 양지살과 갈빗살을 달달 볶다가 쌀뜨물 부어 팔팔 끓이다 중간 불로 줄여 진득하게 끓여준다. 제법 오래 끓이기에 처음부터 간을 세게 했다간 낭패 보기 쉽상이다. 귀찮다고 참기름과 국간장에 볶는 과정을 생략하면 미역 비린내와 고기 냄새가 날 수도 있고, 감칠 맛이 덜하다. 귀찮아도 재료를 달달 볶아 처음엔 조금 삼삼한 듯 해도 조바심내지 말고 진득하게 오래 끓이다 보면 재료끼리 서로 맛도 어우러 지고, 밍밍하던 간도 나아진다.
이쯤 되니, 국 하나 끓이는 모습이 우리네 삶과 닮아 있다. 달랑 두 사람만이 헤쳐나갈 세상이라면 파트너도 나도 각자 최상의 재료가 될 것. 두 사람이 시너지를 내기 위해선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니 초반에 너무 큰 에너지는 쏟지 말 것. 빙그레 웃음이 난다. 사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쌀뜨물 붓고 한번 파르르 끓고 난 후부터 성격 급한 나는 미역국 간을 보기 시작한다. '아직 마트 문닫을 시간 아닌데, <고향의 맛>을 사러 뛰어 나갔다 와야 하나?' 자주 먹는 미역국도 아니고 생일날 한 번 먹는 건데 맛있게 먹는 게 나을 거란 그럴 듯한 논리에 하마터면 넘어갈 뻔 했다. 그래도 정성이지, 생일상인데 합성 조미료를 넣어 맛 흉내만 낼 수 없다는 16년차 주부의 자존감으로 마트로 뛰어가려는 마음을 간신히 추스릴 있었다.
역시 밤을 쪼개 미리 끓여둔 미역국은 다음 날 아침 꽤 먹을만 해졌다. 먹기 직전, 팔팔 끓여 마지막 간은 소금 약간으로 깔끔하게 마무리 하면 완성이다. 마지막까지 간장을 쓰면 국물 색도 탁하고, 미처 날아가지 못한 간장 향이 겉돌아 이물감이 느껴진다. 이윽고 소금 몇 꼬집을 넣고 국을 완성하려는 찰나, 맘에 들지 않는다. 맛은 있는데 아주 맛있는 맛이 아니다. 박수는 받을 수 있으나 환호가 나올 수는 없는 퍼포먼스다. 아, 이런!! 낭패다. 그러나 괜찮다. 얼른 냉장고를 열어 홍게액 반 스푼을 마술사보다 빠른 손으로 휘릭 넣고 센 불에 훌훌 저어가며 팔팔 끓여낸다. 완벽하다.
맞다, 인생엔 때로 융통성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