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례가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

50대에 주례 데뷔기

by 치킨만먹어

2024년 3월 초 정말 아끼는 제자가 찾아왔다. 졸업한 지 7년 이상 된 졸업생이었다. 물론 1년에 2~3차례 연락도 하고 만나기도 했다. 찾아와서는 올해 결혼 계획을 밝히고 주례 부탁을 하였다.

언제인데?

11월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내가 주례를 할 짬밥인가?'에 대한 생각에 잠길 때 얼떨결에 '그래 좋다'라고 해버렸다. 당시 11월이라는 기억이 잘 안나는 걸 보니 주례를 해도 되나라는 생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아무튼 봄학기가 지나고 여름이 지나 가을에 신랑 신부가 찾아와 인사를 하니 덜컥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고 마치 박사 논문 쓰는 것처럼 매 순간 생각 하게 되었다.

동료 선배 교수에게 처음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을 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해놓은 원고가 있으니 그걸 참조하면 된다고 해서 9월 10월은 그리 쉽게 지나간 것 같다. 그런데 그 선배교수는 주지 않았다. 11월 15일이 넘어서 주었지만..

대학원 동기나, 후배들 모임에서도 얘기를 해봤지만 다들 자기 일이 아닌 듯 가볍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얘기했는데 실컷 웃는 소재가 되었을 뿐 주례 단서조차 얻지 못했다.

결혼식은 11월 말일인데 10월 달부터 정말 괴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한강 소설가가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내가 받은 것도 아닌데 엄청나게 기뻤다. 그녀의 소설 '소년이온다', '채식주의자' 정도는 읽고 있었고 더 많은 작품에 대한 관심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녀가 시집을 출판한 걸 알게 되었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시집 제목도 특이한데 운명처럼 손에 잡혀 펼친 시가 '괜찮아'였다. 이 시를 보고 1주일 이상은 생각한 것 같다. 너무 공감돼서,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례 고민도 해결이 되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고친 주례사다


주례사

안녕하십니까? 오늘 주례를 맡은 경남대학교 진홍근 교수입니다.

저는 오늘 신부인 한 OO 양을 대학교에서 가르친 경험으로 오늘 이 주례를 맡게 되었습니다.

주례는 보통 인품과 덕망이 있으신 분이 맡으시는 자리인데, 부족한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되어 긴장이 됩니다. 그러나 신랑 신부와의 인연을 생각하며 용기를 내어 이 자리를 빛내고자 합니다.


주례는 아주 짧게 하는 게 요즘 시대에 미덕이라 들었습니다. 아주 짧은 주례 시작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축하드립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두 분이 결혼을 결심했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특별하고 용기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순간은 온전히 두 분의 것이니, 마음껏 기뻐하시고 축복받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신랑 신부는 이 기쁘고 아름다운 순간을 마음껏 받아들이고 영원히 이 행복을 간직하기 바랍니다. 하객 여러분 오늘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예쁘고 기쁘고 행복한 이 한쌍의, 이 아름다운 결혼의 순간을 큰 박수로 축하해 주기 바랍니다. 자 여러분 삼라만상 모든 기운을 모아서 이 한 쌍에게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양가 부모님께도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자녀를 키우며 쏟으신 사랑과 노고가 오늘 이 아름다운 결실로 이어졌으니 얼마나 뿌듯하실까요?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행복한 경험을 하고 계신 양가 부모님에게 축하인사 드립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이 두 사람의 결혼은 작게는 신랑의 친가 외가, 신부의 친가 외가 등 적어도 4개의 가족 이상이 만든 자리이기도 합니다. 오늘 결혼하는 이 두 사람을 위해 이렇게 많은 가족과 지인들이 방문했다는 사실을 신랑 신부는 평생 간직하고 살기 바랍니다.


사랑과 결혼 생활에 대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결혼 생활 25년 차지만, 아직도 제 아내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태반입니다. 하지만 제가 전하는 당부의 말이, 지금 출발하는 신랑 신부에게 공감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시 한 편에 기대어 사랑과 결혼의 의미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얼마 전 소설가 한강이 한국인 최초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인기에 기대어 저도 한강 소설가가 쓴 시 한 편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아

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너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려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구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저도 최근에 아내에게 ‘왜 그래’ 대신 ‘괜찮아’를 건넸더니, 정말 효과가 좋았습니다. 이걸 왜 최근에 알았는지 교수라는 직업이 부끄러웠습니다. 양말을 아무렇게나 벗어도, ‘괜찮아’, 화장실 머리카락이 그득 보여도 ‘괜찮아’를 외쳐 보세요. 부부의 행복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 당연하지만 부부의 사랑은 서로가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노력의 키워드는 ‘괜찮아’이고 내가 와이프에게 ‘괜찮아’ 소리를 듣도록 노력하고 남편에게 괜찮아 소리가 입에 붙을 정도의 믿음이라면 백년해로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멋진 신랑 이 OO 군과 아름다운 신부 한 OO 양도 서로에게 ‘왜 그래’보다는 ‘괜찮아’라는 말을 더 많이 건네며,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만들어가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두 분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광고학전공 교수로서 짧게 한 마디만 덧붙이겠습니다. 결혼은 서로를 위한 가장 긴 광고 캠페인입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응원하며, 평생 최고의 모델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이제 광고는 끝났으니 본방송, 두 분의 멋진 결혼 생활을 시작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행복하세요!

2024년 11월 30일 주례 진홍근


몇몇 단어에 발음이 꼬였지만, 그래도 우렁차게 잘했던 같다. 지난 3월부터 고민한 숙제를 해결하니 그날 먹은 잔치 음식이 왜 이리 달던지 나의 첫 주례는 이렇게 끝났다.


#주례사 #주례 #결혼축사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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