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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윤이 Feb 13. 2021

엄마는 유교 걸

나는 유교 걸이 아니다.

"엄마는 유교 걸이야"

"아빠한테 싫은 소리를 하면 엄마가 아빠 편들잖아."

명절날 저녁 식사를 남편과 아들이 준비를 했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아빠가 저녁 준비하느라 수고했으니까 했더니 딸이 이왕 쉬는 것 쉬지 왜 설거지를 하려고 하느냐고 하며 유교 걸이라고 한다.


내가 태어난 곳은 양반은 이란 말을 자주 듣는 마을이었다. 같은 성씨들이 많이 모여사는 곳이어서 더욱 예의범절을 중요시하였고 나이가 어려도 학렬이 높으면 대부, 할아버지, 아저씨, 형님, 조카가 분명하게 구분 지어지는 곳이었다. 가부장제 시절이었는데도 남자들이 여자들을 존중해주는 곳이라는 생각을 받으며 자랐다.  특히 우리 집은 여자와 남자의 차별이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왜냐하면 공부를 가르칠 때 딸이 희생되는 일은 없었다. 남자와 여자가 하는 일은 구분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힘든 일은 서로 도와가며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제사 준비를 해도 여자들만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나 오빠들이 늘 주변에서 힘든 일들을 도왔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결혼을 했을 때 장남에 딸이 다섯인 집으로 시집을 갔다. 그곳에서 나는 명절 때 혼자 일을 했다. 딸 다섯에 사위 다섯 그리고 조카들 한번 모이면 26명이 모인다. 제사 음식이며 식사 준비, 그리고 설거지는 내 몫이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짐을 정리하다 남편이 "이제 우리 제사 지내지 말자"해서 그래,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하반신 불구이신 소대변을 받아내야 하는 시어머니가 우리와 함께 사시게 되었다. 그 당시 딸이 고등학교 1학년, 그 후 5년을 모셨다. 명절이 아니어도 시누 가족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요구사항이 많았다. 우리 가족은 모두 지쳐 있었다. 딸아이는 지금도 그 시절을 돌아보며 "그때 할머니만 안 모셨으면 난 서울대를 갔을 거야, 엄마가 유교 걸이어서 이렇게 된 거야"를 반복한다.


요즘 우리 집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오랜 세월 제사라는 것을 하며 살아온 삶이어서 제사를 안 지낸다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명절 때는 제사를 지낼 때처럼 음식을 준비했었다. 올 설 명절은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갈비와 물김치 그리고 만두만 만들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것도 남편과 함께 만들었다. 남편도 세상이 변해 가는 것을 알고 있는지 요즘은 옆에서 잘 도와주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들기도 잘한다.  오늘은 아침식사를 하고 딸과 산책을 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고 요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산을 한 바퀴 돌고 들어와서 남편과 아들이 준비해준 저녁을 먹었는데도 이젠 편안하게 받아먹을 수 있는 수평적인 가족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좋았다.


설날 산에서 딸과 함께 들은 새소리

나는 유교 걸이 아니다.


나의 부모님께서 가르쳐주신

예의범절이 몸에 배어 있어서

나도 가끔 힘들 때가 있다.

그것은

직장생활을 할 때

상사의 부당함이나

주변의 옳지 않은 비리가 눈에 보여도

참아내야 하는 힘으로 작용했고

더 큰 것은

시집살이의 부당함과

시어머니의 자기 자식만의 사랑이 각별해서

차별대우받으며 자란 사람이 아닌 나는

몹시 힘들게 견뎠다.

그래도

나는 갑질 하는 어른이 아니다.

위아래를 구분할 수 있고

딸과 아들을 편애하지 않으며 키웠고

나와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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