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 : 삽달령 → 석두봉 → 고루포기산 → 능경봉 → 대관령
거리 : 27km
시간 : 11시간 등반
여러분은 야간 산행을 하며 보석이 깔린 길을 걸어본 적 있나요?
헤드랜턴 하나에 의지해 산속으로 들어가자 세상은 순식간에 좁아졌다.
빛이 닿는 곳만 보였다. 마치 긴 동굴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눈앞의 길바닥이 번쩍였다.
보석이었다.
누군가 밤사이 길 위에 조용히 흩뿌려 놓은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 발걸음을 늦췄다.
혹시라도 이 아름다움을 깨뜨릴까 봐 발을 사뿐히 내려놓았다.
아, 봄이 오고 있구나.
자연은 늘 이렇게 말없이 계절을 바꾼다.
만약 오늘 이 산에 오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이런 풍경이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 생각한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백두대간을 한 번쯤 걸어봐야 한다고.
자연은 상상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장면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니까.
백두대간을 걷는 동안
비와 눈이 오지 않은 날이 손에 꼽았다.
날씨는 늘 우리 편이 아니었지만,
그 덕분에 아무나 볼 수 없는 풍경을 만났다.
안개가 짙게 깔려있었다.
앞사람과 조금만 떨어져도 금세 모습이 사라졌다.
헤드랜턴 불빛조차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
발밑에서는 부드러운 흙의 촉감이 느껴졌다.
아직 겨울인데… 땅은 먼저 봄을 알고 있는 듯했다.
길 전체가 유난히 반짝였다.
옆에 선 나무조차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서
나는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조금씩 어둠이 옅어졌다.
짙은 청색 사이로 나뭇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긴 마법이 천천히 풀리는 순간처럼.
어디선가 새가 울었다.
아침이 오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 찬란하던 보석들은
날이 밝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눈이 남은 산길 위에는
성에가 내려앉은 나뭇잎들만 조용히 깔려 있었다.
환상의 동굴 같던 밤의 산은 사라지고
대신 넓어진 시야 속에서 나무들이 하나둘 다가왔다.
그 순간 깨닫는다.
자연 앞에 서면
인간은 한없이 작아진다는 것을.
어둠 속에서 빠르게 움직이던 발걸음도
빛이 들어오자 저절로 느려졌다.
사람들은 걷는 것보다
풍경을 바라보느라 더 자주 멈춰 섰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세상은 층을 이루고 있었다.
아래는 검은 산자락,
그 위에는 붉게 번지는 기운,
그리고 가장 위에서 옅은 하늘이 막을 걷어 올리고 있었다.
“와… 저기 봐. 아침이 온다.”
누군가 숨죽여 말했다.
“화란봉에 올라가 해 뜨는 거 보자!”
하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시뻘건 해가 용솟음치듯 솟아올랐다.
순간 산 전체가 빛에 잠겼다.
멀리 있던 능선과 우리가 넘어야 할 봉우리들이 또렷해졌다.
화란봉에서는 3·1절을 기념해
쏘가 준비해 온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바라보는데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괜히 뭉클해졌다.
능선을 따라 걷다 고루포기산(1,238m)에 도착해 간단히 요기를 했다.
그리고 다시 능경봉을 향해 올라갔다.
산중턱에 행운의 돌탑이 있었다.
돌을 하나주어 탑 위에 얹고 걸음을 재촉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길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능선을 오르다 문득
형광등 아래 앉아 있던 조사실이 떠올랐다.
“교육을 좀 받으시는 게 좋겠어요.”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 차갑게 들렸다.
나는 빨리 끝내고 싶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선택이
훗날 어떤 시간을 가져올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모님들께 전화하세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한마디에
길게 붙들고 있던 시간이 풀려 내렸다.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왜 그랬냐고 물어야 할까.
생각이 엉킨 채로도
발은 묵묵히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다.
앞에서 내려오던 사람들이 물었다.
“어디서 오세요?”
“삽달령에서요. 능경봉 아직 멀었나요?”
“조금만 올라가면 됩니다!”
그 말 한마디에 다시 힘이 났다.
그리고 마침내 —
마지막 봉우리 능경봉(1,123m).
정상에서는 시산제가 한창이었다.
돼지머리와 떡, 과일, 막걸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내가 얼마나 배고팠는지 알아버렸다.
시산제가 끝난 뒤
우리는 떡과 돼지머리 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막걸리도 권했지만
하산길이 떠올라 몇 모금만 마셨다.
내려가는 길은 미끄러웠지만
속이 든든해지자 걸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대관령 차고지로 향하는 길.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길가에는
버들강아지가 피어 있었다.
겨울이 물러나고 있었다.
27km를 걷는 동안
우리는 계절 하나를 통과한 셈이었다.
겨울의 끝에서,
나는 분명 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