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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e Oct 19. 2023

‘야 콜라, 너마저 날 무시해?’ _워홀 2일 차

2016.12.21.


세상에 콜라한테 무시당한 사람이 있을까?

그건 바로 나, 호주 도착 이틀 째, 살다 살다 콜라한테 무시를 당한 기분이 든 사건이 있었다. 아직도 잊지 못할 그 사건은 호주에서 처음 도전한 맥도널드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_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호주에서 처음으로 가 본 맥도널드, 공항-백패커-은행에서 그랬던 것처럼 거기서도 우물쭈물 벌벌 떨며 겨우 햄버거를 주문했다. 큰 한숨을 내쉬고, 한 관문을 넘어선 탓일까? 그 떨림과는 다르게 바깥 날씨는 얼마나 좋아 보이던지, 매장 안에서 쭈구리로 먹는 것보다 '여행자'로서 즐겨보자는 마음이 샘솟았고, 마침 바깥 테라스 자리도 비었고 누군가 친절하게 문도 열어두었다. 옳다구나 하고 바깥을 나오자마자 바람이 '휙!' 불더니 트레이 위에 콜라컵이 '슉!'하고 투포환처럼 맨바닥에 꽂혀버렸다. 순식간에 콜라를 통째로 쏟아버린 것이다.

...

누가 부딪힌 것도 아니고, 내가 넘어진 것도 아니었다. 아니 바람이 불어도 어떻게 액체가 든 컵이 그렇게 슉하고 처박히는 거지? 틱 하는 소리와 함께 안에 이미 콜라는 왈칵 터져 나왔고, 바닥에서는 '치익~' 소리와 함께 거품이 몽글몽글 올라왔다. 놀란 마음도 잠시, 혹시라도 주변에 음료가 튄 사람은 없는지 살펴보는데 다행히 없다. 그러자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후끈거림이 올라오더니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온몸이 홍당무가 되는 것 같았다. 이 순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건 오롯이 나뿐이었는지, 잠시동안의 안절부절을 깨고서 야외 테이블 너머 화단에 떨어진 컵을 주워 들었다. 바닥이라도 닦아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매장 안으로 향한 뒤 아까 지나가다 봤던 청소직원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어야지 생각을 했다.

(상상)

"저기 미안한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내가 콜라를 바닥에 쏟았거든? 혹시 저거 치워줄 수 있니? 내가 닦아야 한다면 닦을 테니까 밀대 같은 거 있니?"


물론 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현실)

"I... Coke!! Threw!!? to the ground!!!?"


총체적 난국이었다. 딱 봐도 '얘가 뭐래는 거야? So what?' 하는 표정의 직원은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안쪽에서 까만색 유니폼을 입은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왔다. 나는 다시 입안에서 웅얼거리던 단어를 굉장히 단호하게 끊어서 던지기 시작했다.

"Sorry, I... (sigh) throw, threw? my coke! (sigh) to the ground, okay?"



잠자코 듣던 그 직원 역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뭐라 뭐라 말했다. 정확히 들리지는 않는데 나중에 상황에 맞는 단어를 사전을 찾아보니 이런 말을 했던 거 같다.

Okay, so you spilled your drink on the floor? Right?


개떡 같은 내 말도 찰떡같이 들어준 매니저에 놀라며 토끼눈을 한채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상황정리가 되고 나서 그 매니저는 내가 들고 있던 컵을 가져가더니 또 뭐라 뭐라 하며 아까 메뉴를 받던 곳 안쪽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속으로 '아니 내가 쏟은 걸 의심하는 건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매니저는 컵을 하나 내왔는데 새로 담은 콜라가 담겨있었다. 묵묵히 컵을 받아 든 나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트레이를 근처 실내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비로소 눈물 젖은 Aussie 머시기 세트를 먹을 수 있었다.


호주에서 첫 맥도널드, 사진에 보이는 노란색 테이블 너머 어딘가에서 일이 터졌다. 어딘지도 몰랐었는데 알고 보니 Darling Harbour근처 McDonald Branch.




콜라가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순간 '아차!' 하는 마음과 동시에 '왜 하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콜라 컵을 다시 잡은 순간, 수습하느라 잠시 잊고 있던 창피함이 온몸 곳곳으로 튀어나왔다. 더욱더 부끄러운 건 상황설명은커녕 아무 말도 못 하고 버벅거리던 내 모습이었다.

왜! 왜! 왜!


머릿속에 '왜'라는 단어로 가득 차더니, 호주에 온 지 이틀밖에 안 됐지만 그간 서러웠던 순간이 마구마구 떠올랐다. 영어는 못 알아먹겠고, '답답한 일이 천지삐까리(?)인데, 이제는 콜라마저 나를 괴롭히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콜라가 사람을 무시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작고 작은 일도 내 마음은 크게 반응하는 순간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새로운 환경, 먼 타국에 와서 콜라 쏟고 나서 말도 못 하는 처지라니.. 나만 못난 거 같고, 이것마저 안되면 뭐가 될까 하는 생각이 스스로를 잠식하는 것 같았다. 호주, 그 커다란 세상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작고 작은 나란 존재, 작은 압정 하나가 발가락에 닿았을 때처럼 따끔 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 알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나중에 읽은 <자존감 수업, 윤홍균>에서 유용한 주문 같은 말이 있었다.


‘그럴 수도 있지!’

‘세상 참 별일이 있네?‘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기엔 30여 년 살면서 넘어지지도 부딪히지도 않고 콜라컵이 바람에 날아간 건 난생처음 있던 일이긴 했다. 그럼 세상 참 별일인 걸로...


시간이 멈춘 것 같던 그 순간이 지나고, 매장을 나와 조금 더 걸었더니 Information Center와 그 옆에 'To Darling Harbour'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호주를 오기 전에도 들어온 그 달링하버를 가보는구나 하는 생각과 이런 기분으로 갈 생각은 없었는데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낮의 'Darling Harbour', 시드니에서 이곳의 매력을 만끽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괜히 콜라에게 심퉁이 난 과거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는 생각엔 항상 '머피의 법칙'이 떠오르는 편이다. 영화 <Interstella>를 보면 주인공 딸인 Murphy(머피)가 아빠 Cooper에게 왜 이런 안 좋은 이름을 지어준 건지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 딸의 질문에 Cooper는 이렇게 답해준다.


"Murphy's Law doesn't mean that something bad will happen.
What it means is whatever can happen will happen. And that sounded just fine with us."

"머피의 법칙은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야.
일어날 법한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지. 그 말이 우리한테 괜찮게 느껴졌지.(의역)"


'Whatever can happen will happen.

일어날 법한 일은 일어난다'


세상 일 중에 마음대로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으로 구분한다면 후자가 더 많은 비중일 거란 생각이 든다. 힘든 순간이 닥치면 또 금세 까먹고 말겠지만, 힘듦의 순간도 시간과 함께 잊힐 거란 걸 떠올리며 누가 이기냐 한 번 버텨주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실수투성이에 잘 안 되는 일 투성이겠지만, 그래도 또 방법을 찾지 않을까. <Interstella> 또 다른 명대사가 떠오른다.


'We will find a way, we always have.'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


(그나저나 여기 호주까지 가서 콜라 쏟은 놈 있어요!!)



<깨알 영어 표현>


'spill' = '쏟다, 흐르다, 흘리다'


그 상황에 말로 하지 못한 표현을 나중에 찾아봤다. 물론 다시 콜라를 엎고 싶진 않지만 다시 한번 그런 일이 터진다면 spill 혹은 drop이란 표현을 쓰면 된다.


단순히 단어를 외우는 것보다 상황과 세트로 단어를 외우는 게 기억하는데 더 도움이 되는 거 같다. 외국에 나갔으니까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이래서 영어공부에서 상상력이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spill 예문 검색, <네이버 영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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