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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e Oct 20. 2023

'그런데 잡은 구하셨어요?' _ 워홀 첫 방 구하기

2016.12.22.


서울에서 자취를 했던 적이 있다. 1년 남짓 시간이었지만 그때의 기억이 유쾌보다 불쾌에 가까운 기억 때문인지 그 이후로는 방 보러 다니는 일조차 싫어졌다. 말이 싫어졌다는 거지 사실은 두려움에 가까웠다. 일종의 배신감이랄까?

집 앞에서 버스를 탈 수 있고, 지하철 역까지 도보 13분, 하물며 서울에서 25만 원에 지상층을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가성비에 쾌제를 외쳤다. 그런데 나는 몰랐다. 내 방에서 주인집인 옆 집 티브이에 어떤 프로가 나오고 있는지 소리로 알 수 있을지 몰랐고, 한 번씩 <검은 사제들>의 나오는 기도문을 외우는 집인 줄 몰랐고, 무엇보다도 내 방 침대 옆 벽에서 옆집 사람들의 샤워 소리, 변기 내리는 소리, 물 쓸 때마다 배수 소리까지 들을 줄은 꿈에도 상상한 적 없었다. 물론 싫으면 나가면 그만인 일이었지만, 불평불만을 쏟아내면서도 그 가격에 그 위치는 못 구한다며 꾸역꾸역 살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괜찮은 조건이라 생각했던 것에 배신, 새로 방을 구해도 그 모양 그 꼴일까 싶어 서울 생활 접고 고향으로 내려왔던 것인데, 그런 내가 호주에서 방을 구해야 한다니…. 하기 싫다고 해서 언제까지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밤새 소리 지르며 파티하는 이 백패커를 탈출하고픈 마음도 방을 구해야겠단 생각에 무게를 더했다.



한국에서도 부동산 돌고 방 구경 하는 게 참 힘들었는데, 호주도 만만찮았다. 중개사가 따로 있는 건 아니었지만 중개 사이트인 Gumtree, Flatmate, 호주나라 등등 하우스 셰어 하는 곳을 찾아봤다. 조건 검색으로 대충 살고 싶은 기준은 세웠지만 정작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 대체 어디에서 살아야 할지 정하지 못한 것이다. 서울도 참 동네가 그렇게 많았는데, 호주 대표 도시답게 시드니도 만만찮게 정말 많은 동네가 있었다. 가짓수가 많다 보니 선택이 어려워지는 우유부단함이 튀어나왔다. 급한 대로 나의 동아줄 영준이에게 연락해서 '피해야 할 곳' '대략적인 주거비' '집 형태' 등을 물어가며 사이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영준이는 지금은 시티에 살고 있지만 곧 채스우드(Chatswood)로 이사 간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아무 생각 없이 채스우드 쪽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영준이에게 민폐를 많이 끼쳤구나 싶다. 영준아 진심 고마워!



https://transitmap.net/sydney-rail-map-2019/


방을 찾는 기준은 몇 가지가 있었다. 닭장셰어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에 웬만하면 2-3인실을 기준으로 잡았고, 마치 통계라도 낼듯한 기세로 집에 사는 총인원은 몇 명인지, Bath는 몇 개이고, Bath당 몇 명이서 쓰는지, 제공되는 유틸리는 무엇인지 등등 필요하다고 여긴 정보까지 다 물어봤다. 호주에 와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셰어의 종류에는 '거실 - 가라지(Garage, 차고) - 옷장(?)'셰어까지 있다고 한다.

방을 찾아보면서 웃긴 일이 있었는데, Gumtree에서 셰어생을 구한다는 글을 보고서 심혈을 기울여 한 땀 한 땀 단어를 골라 겨우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으로 '예 안녕하세요"라는 답장을 받았다. 아니 한국인 티 나도 조금 모른 척해주시지 ㅎ. 하기사 내가 이름을 보냈으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Minimum stay:

미니멈 스테이, 셰어에 입주 시 최소 거주 기간이다. 새로 셰어생을 구한다는 명목이었고, 그걸 채우지 않고 나가면 처음에 낸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다.



" ~~~number ~~~~~~ disconnected."
"??"


채스우드에 도착하고 나서 전화를 걸었는데 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방을 안내해 줄 사람이라며 분명 집주인아주머니께서 알려준 번호인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number며 disconnected라고 하는 걸 보아 없는 번호라고 하는 것 같았다. 어이가 없어서 몇 번을 더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수화기 너머로는 같은 말만 되풀이되고 있었다. 오기 전에 전화라도 해볼 걸 그랬나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채스우드에 와있고 소용없는 일이었다. 여전히 집주인아주머니는 전화를 받지 않고, 답답한 마음만 더 커져갔다. 급한 대로 스마트폰으로 사이트에 들어가서 한인셰어 사이트에서 채스우드의 다른 방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제는 문자가 아니라 바로 전화를 걸었다. 부랴부랴 몇 군데 전화를 걸어봤지만 이미 방이 나갔거나 지금은 인스펙션이 안된다는 답변뿐이었다. 더 이상은 아니다 싶어 떠날 채비를 하는데 처음 약속 되었던 그 집 아주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번호를 잘못 알려줬다고 한다.


*Optus advises that the number you have dialled has been disconnected.

안 들렸던 안내문을 찾아봤다.




제대로 된 번호를 받고 나서 연락을 했더니 드디어 연락이 닿았다. 마중을 나온 남자셰어생과 인사를 나눈 뒤 따라가며 '방 보러 갔을 때 꼭 확인할 것들'을 되뇌고 있었다. 건널목을 지날 때쯤 그분이 나를 보며 한 가지를 물었다.

'잡(Job)'은 구하셨어요?


그럴 리가 없기에 '아뇨, 일단 집을 먼저 구하려고요.'라고 얼버무렸다.

"그래요? 뭐 시티까지는 갈만 한데, 저는 North Sydney 근처에서 일하거든요. 보통 잡 구하면서 근처로 이사 가는 게 보통이라서 한 번 여쭤봤어요. 호주 온 지는 얼마 되셨어요?"

이제 삼일째라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는 거의 6년째 살고 있다는 말과 함께 '그래도 잡을 먼저..'라는 뉘앙스를 남기며 집을 안내해 줬다.

입구부터 엘리베이터까지 모두 카트키가 있어야 출입이 가능한 아파트, 내가 본 방은 두 명이서 화장실 및 욕실을 쓰고, 마스터룸에 또 다른 두 명, 그리고 거실 한 구석에서 주인아주머니께서 주무신다고 했다. 속으로 '말로만 듣던 거실셰어인가?'라고 떠올리는데, 아주머니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당일을 하셔서 크게 부딪힐 일 없을 거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만약 입주한다면 처음에만 찍히지 않으면 된다는 꿀팁도 전해줬다.



방 컨디션은 말할 것도 없이 괜찮아 보였다. 큰 기대를 하지 않은 것도 컸지만, 한국에서는 꿈도 못 꿀 고층 아파트에다가, 서울 자취방 생활, 지금의 백패커 생활과 비교해 보니 이 정도면 감지덕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층이라 볕도 잘 들고, 바람도 술술 부니 통풍 잘 되고, 침대-옷장-책상에다가, 쌀-세제 제공, 풀장과 Gym까지 사용 가능이라고요?! 마지막으로 마트와 역까지 가깝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당장이라도 입주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좀 전에 청년이 말해준 '잡(Job)'에 대한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방부터 구하는 게 좀 아닌가…?'


처음 본 사이지만 호주 생활 선배의 조언은 조용한 우물에 던진 돌처럼 잔잔하고 강력했다. 먼저 거점을 정하고 출퇴근할 각오로 생각했는데, 아까 그 말을 듣고 나니 앞서 나열한 수만 가지 좋은 점 대신 여기에 살다 보면 불편할 점을 찾기 시작했다. 첫째, 미니멈 스테이(Minimum stay, 필수 거주기간)가 세 달, 호주 온 지 얼마 안 되고 변수가 많은 내게 세 달은 너무 긴 기간이 간 했다. 둘째, 거실 한구석이긴 했지만 아주머니께서 주무신다는 점, 새벽에 물이라도 먹으러 갔다가 찍히면 어떤 한담? 마지막으로 셋째, 그 외엔 사실 없었지만 정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처럼 정해야 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게다가 한 집 보고 정하는 건 후회도 남을 것 같아서 몇 개는 더 보고 정하자는 마음으로 선회했다. 잘 알려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며 나의 호주에서의 첫 방 구경 (Inspection)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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