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인스펙션(Inspection, 방 구경)은 저녁 6시, 중간에 텀이 너무 길다 싶었는데 영준이가 '점심 같이 먹어요~!' 하는 구원의 메시지를 보내줬다. 백패커가 있는 시티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딱 말투가 우리 갱상돈데?
전화를 받아보니 아주머니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 보러 오는 사람 맞냐면서 '어제 얘기한 사람이랑 목소리가 똑같네! 거기도 딱 말투가 우리 갱상돈데?'라면서 차 타고 가는 길이니 역 근처에서 기다리면 된다고 하셨다. 어제 전화한 적은 없는데.. 싶으면서도 기왕 나온 김에 하나 더 보자는 마음에 흔쾌히 구경해 보기로 했다. 아마도 아까 기다리며 알아본 채스우드 근처 셰어 구하는 집이겠거니 했다.
조금 있다 보니 SUV 한 대가 도착했고 차에 올라탔다. ‘어서와요’ 하는 인사와 함께 처음에는 '경상도는 마음이 잘 통해'라며 친밀감을 내비치시더니 '워홀러도 등급이 있다' '호주에서는 물, 전기 아껴 써야 한다' '한번 말하면 지켜야지 두세 번 말하면 그땐 아웃이다' 등등 집의 규율을 읊기 시작하셨다. 오래전 호주로 이민을 오셨고, 남편분은 배관공 일을 하신다고 한다. 열심히 해야 그만큼 빛을 본다며 근면성실을 강조하시다가 영어는 좀 하냐고 물으셨다. 이제 삼일차, 어버버 거리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 고개를 저으며 "요즘 느껴보니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 같아요"라고 했더니, 근처 한인마트에서 사람 구한다던데 들어오기만 하면 자기가 잘 이야기해 주겠다는 선심도 내비쳐주셨다.
집은 방송에서 봤을 전형적인 하우스(전원주택) 형태. 조금 멀게 느껴졌는데 차를 타고 오느라 돌아온 거지 걸어가면 더 빠르다는 부연설명도 잊지 않으셨다. 집에는 온 가족이 다 산다고 했고, 아들은 경찰, 며느리는 노0텔 직원이라는 자랑(?)을 하신 후, 부엌 서랍장에서 종이를 꺼내오셨는데 까만 매직으로 큼지막하게 무언가 써져 있는 게 보였다. 글로도 보이는데 그걸 차례로 따라 읽으신 뒤 다섯 시에 여자 두 명이 보러 오기로 했으니 이 정도 조건 구하기 힘들다며 얼른 입주하는 게 좋을 거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방도 더 넓고 가격도 훨씬 싼 곳이었지만 'smother(숨 막히게 하다;질식시키다)'란 단어가 절로 떠올랐다. 한여름에 수도 계량기가 고장이라며 수도를 끊어서 야밤에 샤워도 못하게 만들었던 서울 자취방 주인집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저마다의 사연, 저마다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이들, 그들의 삶을 존중하지만 이곳에 살았다가는 먼저 숨 막혀 죽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예정에 없던 방을 보느라 영준이와 약속시간이 지연된 게 마음에 걸려서 좀 더 속력을 내어 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겼다.
나름 분주한 아침을 보내고 Town hall의 어느 일식당에서 영준이와 점심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치고 호주에서 이국적인(?) 한인 카페에 가서 요 며칠 사이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영어학원에서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인데도 호주에 오기 전부터 '오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하고 먼저 손 내밀어준 영준이. 글을 쓰는 지금 다시 떠올려봐도 영준이가 없었으면 호주에 처음 도착하고 나서 잘 적응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 어느 것보다도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게 있는 거 같다. 내 말만 하기 바빴던 요즘, 나도 누군가에게 위안이 될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약속시간 보다 이르긴 했지만 곧장 다음 인스펙션 장소인 Roseville station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