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26.
하루는 긴데 일주일은 참 빠르다. 호주에 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주일이라니…. 시간은 잠자코 두면 얌전히 옆에 있는 것 같은데, 잠깐이라도 관심을 주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손해 본 기분이 든다. 내 기분과 상관없이 시간은 이미 흘렀고, 거금 $55달러를 주고 연장한 백패커 체크아웃도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물러 설 곳이 없는 만큼 시간이 흐를수록 참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하루하루다.
쌓여가는 불안감에 부채질을 하는 건 다름 아닌 잡(Job) 문제. 그 흔한 'Unfortunately' 답장조차 없었으니 이젠 어떡하나 싶었다. 돈을 내기만 하면 문제없는 집문제는 그저 기대치를 낮추는 쪽으로 선회했지만, 돈을 벌어야 하는 Job 문제는 낮출 기대조차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불행(不幸)의 시작은 불행(不行)이라 했던가? 사실 스스로 자초한 부분도 있다. 잡을 구하고 싶다면서도 뭔가 있어 보이는 온라인 채용사이트만 기웃거렸지, 정작 근처 매장에 직접 이력서를 제출해 본 적은 없으니 말이다. 데드라인은 점점 가까워지고 스스로에 대한 비난이 더해질수록 최악의 상황만 눈앞에 아른거리고, 그럴수록 두려움이 앞을 가려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시드니? 시드니! 시드니..'
구할 일자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호주나라에 올라오는 $10~12불 한인 캐시잡에 지원하면, 당장 뽑아줄지는 미지수더라도 답장조차 오지 않는 곳보다는 일할 가능성이 높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공고를 볼 때면 이미 호주 워홀을 겪었던 친구에게 들었던 시급 $30 이야기가 떠오르더니 금세 시큰둥해졌다. 어찌 보면 가장 큰 문제는 '대박'을 좇는 나였다.
$30의 잡을 구했던 친구는 본인도 운으로 구했다고 했었다. 점점 더 초조해질수록 그 친구 말을 빌려 '그럼 난 왜 이렇게 운이 없지?' 같이 삐딱한 생각만 들었다. 스스로를 향한 비난의 화살이 동이 날 때쯤, 이제는 내가 아닌 '터'가 잘못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미쳤다. 이 모든 게 '시드니' 탓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고시급 잡에 대한 미련은 이미 호주 이틀째에 튀어나왔다. 잡도 집도 애매했던 그때, 그 친구 이야기가 떠올라서 전화번호는 없는데 궁금하니 급하게 보이스톡을 전화를 걸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봉0이는 적응 잘하고 있냐며 격려도 정보도 흔쾌히 알려줬다. 부랴부랴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기가 워홀 한지도 시간이 많이 흘러서 정확하진 않다지만 당장 들어도 가로막을 걸림돌이 세 가지는 되었다. 먼저, 그 공장은 멜버른(Melbourne)에 있다고 했고, 지금 거기서 고용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고, 마지막으로 외곽에 있다 보니 자동차가 없으면 출퇴근이 힘들 거란 이야기를 해줬다.
어려운 건 확실해 보이는데 도통 눈앞에 멜버른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일전에 또 다른 나의 워홀 멘토이자 워홀 선구자인 지은이에게 지역이동에 대해 상담을 의뢰한 적이 있다. 그때 지은이는 브리즈번(Brisbane)의 '잉햄'이라는 공장을 알려줬는데, 지난 크리스마스이브 때 이미 지원해놓기도 했다. 멜버른, 브리즈번, 퍼스, 시드니…, 그중에서 골랐던 게 시드니였는데, 이제 와서 또 고민을 하고 있다니…. 이번에도 비슷한 문제로 징징대는 나이 많은 오빠의 토로에도 내 일처럼 공감해 주고 조언해 준 지은이에게도 참 감사하다. 이야기 도중에 지은이의 말에 용기를 얻어보기로 했다.
아니다 싶을 때는 방향을 트는 것도 한 방법 아닐까요?
마음은 기우는데 언제나 예산이 가장 큰 문제였다. 가고 싶으면 가면 되겠지만, 내가 간다고 공장에서 채용이 될지 아닐지도 모르고, 지역이동을 하게 되면 그간 시드니에서 숨만 쉬어도 나간 돈과 시간을 그 지역에서 또 고스란히 나갈 게 불 보듯 뻔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급하게 표를 찾는데 하필 크리스마스&연말 홀리데이 시즌이라 평소보다 3배는 높게 책정된 비행기 삯도 고민을 지속하는데 일조했다. 참고로 시드니에서 브리즈번까지는 최소 900km가 넘는데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 2번 왕복하고도 100km가 남는 정도다. 차량으로는 못해도 10시간, 트레인은 14-16시간, 비행기로는 1시간 반이 걸린다고 한다.
돈도 돈인데 찝찝한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일전에 은행 계좌를 만들면서 카드도 신청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당일 혹은 며칠 정도면 처리해 주고도 남을 것을 여기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겹쳐서 못해도 28일에나 수령 가능할 거 란 게 아닌가? 이것도 다른 곳에서 할 수는 있겠지만, 어렵게 만든 계좌다 보니 혹시라도 다른 곳에서 안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카드발급까지 마무리 짓고 가는 게 마음이 편해질 거 같았다.
조금 다른 우회로도 있었다. 비행기 표값도 떨어지고 카드 문제도 해결할 방법으로 시드니에서 한 2주 정도 더 지내다가 떠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문제는 대부분 숙소가 미니멈 스테이*가 있었고, 단기 숙소로 지내려면 백패커에 잔류가 오히려 더 나아 보였다. 거기에 파생될 문제는 더 내는 숙소비와 비싸게 낼 비행기 삯 중에 어느 게 더 비쌀까 하는 계산이 생겼다.
문제, 문제, 문제, 하나를 열면 하나가 더 터지고, 해야 할 일은 넘쳐나는데 도저히 손 쓸 겨를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야 말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니멈 스테이, 디파짓(deposit)과 2주 노티스(notice)
: 셰어나 플랏메이트는 우리나라처럼 부동산을 끼고 하는 거래가 아니다 보니, 서로의 신용을 위해서 마스터(Landlord)가 보통 2주 치의 셰어비를 보증금 개념으로 받아둔다고 한다. 일종의 암묵적 합의이기도 한데, 나중에 파손된 물품이 있으면 배상 명목으로 디파짓에서 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것 때문에 정말 아니다 싶을 때에도 돈 없는 워홀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지내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에 더해 2주 노티스는 나가기 2주 전에 방을 나가는 것을 미리 알려야 한다는 것인데, 살던 사람이 나가면 새로운 셰어생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기간이라고도 하던데, 개인적으로는 집주인을 위한 구실인 것 같다. 물론 2주 노티스 덕분에 집주인도 사람을 내보내려면 2주 노티스를 지켜야 한다는 점은 마지막 보완장치가 되기도 한다.
고민을 끝내는 방법은 흔히 두 가지다.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거나, 아니면 아예 고민을 잊어버리는 것. 한쪽은 직면하는 것이고, 한쪽은 도망에 가깝다. 프로 도망러로써 이번에도 현명한 길 대신, 또 한 번 제쳐두기로 했다. 그런고로 지난밤에 들어온 칠레 청년 Mariano와 같이 시드니의 동물원 중 하나인 Taronga zoo'를 가기로 했다. 하기사 문제를 계속 붙들고만 있다고 해서 저절로 해결되는 건 아니지 않던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던데, 살짝 비틀어서 비유해 보자면 지난 이브 때처럼 좀 걷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까 하는 도망러의 변이 쑥쑥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