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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 명령', 나의 산불 재난일지 02

'대피 명령'

by 영이

나의 산불 재난일지 02

- '대피명령', 25.03.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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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임님, 괜찮으세요? 어머님이 몇 번 전화하셨던데요"


업무를 보고 있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화들짝 놀라 스마트폰을 가지러 갔다. 보통 일할 때 휴대폰을 따로 거치해두고 있어서 전화가 온지도 몰랐던 것이다. 통화 목록을 확인해 보니 부재중 전화를 알리는 빨간색 글자로 '어머니 (2)'라는 표시가 있었다. 곧장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지금 다른 집 할머니랑 차 타고 같이 실내체육관으로 대피 중이야.
아빠는 글쎄 이런 시국에도 농기계 반납하러 간다고 가셨어"


오기는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급격하게 올 줄은 몰랐다. 분명 한두 시간 전에만 해도 멀쩡했던 우리 동네에 산불이 웬 말인가 싶었다. 아이고 아버지는 왜 또 대피 안 하고 거길 들어가신다는 건가? 급하게 부서장께 말씀드리고 집으로 향했다.


차로 15-20분 정도 걸리는 거리, 마음은 급한데 앞차는 초보인지 노인인지 자꾸 브레이크를 밟았다 뗐다를 반복했다. 겨우 앞차를 추월하고 갔더니 출구 앞을 또 큰 트레일러가 앞을 막고 가고 있다. 바깥은 마치 화산이라도 터진 것처럼 연기뭉텅이가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었고, 연기가 차에 들어올라 차량 외기순환은 내기순환으로 바꿔놓았다. 출구를 나서고 트레일러를 지나 앞으로 가는데 무슨 재난영화가 따로 없는 모습이었다. 뿌연 연기 때문에 시야는 겨우 앞의 차 정도만 보일 정도고, 집에 가까워질수록 연기의 색도 옅은 회색에서 짙은 회색으로 진해져 갔다. 빨리 가겠다고 달려온 만큼 집에서 가까운 도로 출구로 냅다 달렸는데 아뿔싸, 이 출구가 IC와 가까운 탓에 그쪽으로 가는 차량 행렬과 본의 아니게 섞여버리고 만 것이다. 먼저 도착하고도 오히려 더 늦을 사태 앞에 '진작 앞에 출구로 빠질 걸'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떠오르고, 오면서 받았던 통화에서 '긴장 꼭 풀고!'라는 말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음에 폰으로 재난문자며 속보며 찾아보는데 의외로 빨리 체증이 풀려 출구로 나와 집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게 뭐야 대체??'


집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다섯 시 40분 즈음, 마침 내가 도착했을 때 아버지의 포터도 도착했다. 아버지를 보자마자 여길 왜 들어왔냐고 소리소리를 지르고 얼른 대피하자고 말씀드렸다. 오면서도 심하다 생각이 들었지만, 차에서 내리고 나니 연기의 심각함이 피부로 느껴졌다. 당장 대피하자고 말씀은 그렇게 드려놓고서 나는 집에 들어가 휴대폰 충전기와 노트북, 옷가지 몇 개를 급하게 챙겨 트렁크에 실었다. 시골의 여느 개처럼 바깥에 개를 키우고 있었는데, 사람 대피할 장소도 모자랄 거 같아서 미안하지만 꼭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목줄을 풀어주고 돌아섰다.

이리저리 대피준비를 하면서 가장 무서웠던 건 강풍이었다. 여름 태풍에도 그런 바람은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사람이 서있기도 불편할 정도였다. 집 앞 길가에 걸린 표지판은 불어오는 강풍에 벌써 두세 바퀴는 돌고 있었고, 바짝 마른 날씨와 강풍, 건너 마을에 보이는 불길까지, 여기서는 있을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건 날리던 까만 재 같은 것이었다. 불씨도 아닌 것이 먼지처럼 보이는 게 날아와 피부에 닿고 나면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겁고 따가운 게 이러다가 화상도 입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 이런 불똥이 튀어서 불이 번지는구나.'

아버지는 먼저 출발하시고, 나도 출발을 하려는데 곧장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망연자실, 당장이라도 불길이 집에 붙어도 이상할 일 없는 상태였지만 부디 그런 일은 없었으면 하면서도 동시에 또 그건 안 되겠지 하는 생각에 몸이 굳어버린 것이다. 정신을 채 차리기도 전에 강풍에 쓰고 있던 모자가 휙 날아가서 농수로 앞에 나뒹구는 것을 보고서는 얼른 뛰어가 모자를 주운 뒤 차에 올라탔다.


"대피 안 하세요??"


집에서 차를 끌고 나가는데 옆옆집 아주머니가 길가에 서서 내 차 쪽을 보고 계셨다. 창문을 내리고 "얼른 대피하셔야 할 거 같은데요."라고 말씀드리니 "아저씨가 안 간대!~"하는 아주머니 말씀에 반대편 창문을 내리고 아저씨께 "바람이 너무 세서요. 진짜 대피하셔야 할 거 같은데요."라고 말씀드리니 멋쩍은 표정만 지으시더니 휑하니 강둑 저편 불난 곳만 바라보셨다.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가 모셔갈 것도 아니고 여기도 차가 있으니 얼른 나가야겠단 생각에 얼른 차를 몰았다. 마을 출구, 대로로 올리기 전 도로에는 관공서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전화를 하는 모습이 보였고, 대피하는 거 맞냐고 물어보니 한숨을 쉬며 지금 길이 엄청 막힌다고 하는데 하며 얼버무리다가 그래도 대피하시는 게 맞다며 얼른 가라고 하셨다.

차를 대로에 올리고 조금 가다 보니 도로변 곳곳에서 불난 곳이 보였는데, 출퇴근 길에 봤던 농공단지가 불타는 모습이 보였다. 화로짝처럼 훨훨 불타는데, 우리 집도 저렇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은 들었다. 근처 동네에 살던 친구도 대피 중이라고 했고, 고향을 여기에 둔 지인들 연락이 빗발쳤다. 대피하는 중이고, 아직은 모르겠다고 이야기했지만, 혹시라도 불타진 않을지 걱정과 허탈함 그 사이 감정이 들었다.



단시간 한꺼번에 많은 차가 몰리다 보니 도로 또한 아수라장이었다. 차로 가득 찬 도로는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남은 차량 미터기는 100km 남짓, 혹시나 여기저기 이동한다고 치면 기름을 잔뜩 넣어둬야 할 거 같아서 가는 길에 주유소로 차를 뺐다. 다행히 아직 폐쇄하진 않아서 기름을 넣으려는데, 재발급받기 이전 카드로 결제하려다가 취소가 돼서 또 시간이 지체됐다. 마음이 급하니 될 일도 안 되는구나 싶어 다시 새 카드로 결제하고 기름을 넣고 있는데, 근처에서 '아!'하고 짧은 탄식과 함께 저 산에도 불이 붙었네 하고 소리를 쳤다. 나도 고개를 돌려 보니 시멘트공장 뒷산에 불씨가 붙은 것인지 산에 불꽃도 보이고 연기는 더욱더 자욱하게 뿜어대고 있었다. 불이 경주라도 하고 있는 걸까? 무서운 속도로 북쪽으로 따라붙는 불씨가 무섭게 느껴졌다.



다시 차량을 도로에 합류시키고, 엉금엉금 차를 가는데 뒤에서부터 '우위이이이잉' 하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이 사이를 앰뷸런스가 지나가겠다고 하는데 비켜줄 공간도 없어 겨우 옆으로 붙이니 사이 공간이 나서 차가 지나갔다. 그러고 나서는 소방차의 '빠밤, 취익'하는 소리에 길을 내주고 이리저리 움직여 덜 막힐 곳으로 빠져나왔지만 역시나 차가 안 막히는 곳은 없었다. 산불 하나에도 이 난리가 나는데, 전쟁이라도 났으면 정말 한끝에 다 죽었겠구나 싶었다. 시가지를 거쳐 다리를 건너야 대피장소인 실내체육관으로 갈 수 있는데, 마치 재난영화처럼 멀찌감치 보이는 다리도 역시나 수십대의 차로 가득 차 있었다. 의성 쪽에 사는 친구도 연락이 왔다. 자기네들도 대피명령 따라서 나가는 중이라고 했다. 아직 우리 동네는 지나지 않은 것 같아서 혹시라도 우리 집에 불이 붙었는지 물어보니 연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모르겠다고 했다. 너희도 얼른 조심히 대피하라고 인사말을 나누고 나는 또 엉금엉금 차를 이동시켰다. 그러던 찰나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체육관 근처엔 차가 많을 테니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대고 이동하자는 말씀을 하셨다. 체증을 뚫고 장소에 도착하니 다행히도 주차 장소가 남아있었다. 챙겨 온 짐 중 충전기만 들고서 아버지와 함께 실내체육관 쪽으로 걸어갔다. 바람은 마치 사람을 밀어내기라도 하듯이 더욱더 세져서 한 발짝 내딛기도 힘들 정도로 느껴졌다. 그 강풍을 뚫고서 지나가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 산불에 이런 강풍이라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 산불에 이런 강풍이라니...'


하늘이 너무하다 싶었다. 무슨 일부러 온 세상을 불태울 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 불에 이 바람을 불 수 있는지 하고 말이다. 겨우 발길을 옮겨 체육관에 도착하니 눈앞의 입구는 막혀있고 반대편만 열려있는 모양이었다. 짜증이 팍 났다가도 관공서에 전화를 하려다가 어차피 안 받을 거 같아서 반대편 입구 쪽으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보니 이 근처도 아직 주차 자리가 남아있는 걸 보고, '아 차를 이쪽에 댈 걸 그랬나'하는 생각도 스쳤다. 겨우 입구에 도착하니 주변엔 자원봉사 하시는 분들이 천막이며 배식칸을 깔고 계셨고, 주변에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가진 사람들,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통화하는 사람들, 우리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허둥대고 있는 사람들까지 온갖 사람들이 보였다. 지상 입구로 가야 하나 하고 움직이니 멀찌감치서 "지하로 가세요!" 하며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 곧장 지하 입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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