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과 지지부진 대신에, 와인!
이번 생일엔 와인을 마셔야겠다.
생일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날 문득 든 생각이었다. 갑자기 와인잔과 치즈, 과일이 놓인 어둑한 장면 속에 나를 앉히고 싶어져, 적당한 와인바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dd와 d는 매년 성탄절에 조금 사치스러운 저녁을 보냈고 밤이 되면 방으로 돌아와 비싼 와인과 치즈, 시럽에 졸인 과일을 듬뿍 넣은 커다란 케이크, 버터를 바른 빵과 연어와 가늘게 썬 양파를 접시에 잔뜩 쌓아두고 라디오로 캐럴을 들으며 먹고 마셨다.
- 황정은, 『디디의 우산』
잘 알지도 못하던 와인에 매혹된 건, 『디디의 우산』에서 이 구절을 읽은 후였다. 방 안까지 빛이 잘 들던 일요일 오전, 침대도 의자도 소파도 있으면서 괜히 바닥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이 부분을 맞닥뜨리고 나는 잠시 읽는 일을 멈추고, 책을 얼굴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있었다.
두 번째로 읽는 작품이었다. 처음 읽을 땐 오래 머물지 않았던 문장이었다. 그러니까, 그 두 시점의 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있어선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던 거다. 그 당시 나는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 버터 바른 빵과 연어, 얇게 채 썬 후 물에 담갔다 빼내 아린 맛을 없앤 양파, 그리고 와인이 있는 방에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다고, 나로서는 그렇게 선명하게 원하는 장면을 그리는 게 드문 일이라고, 말하고 싶어 못 견디겠어요.
일기장에만 그렇게 썼다. 언젠가는 그 글 토막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지만, 그럴 기회는 (다행히도) 아직 없었다.
d와 마찬가지로 dd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 그의 흐느끼는 듯한 창법도 좋아하지 않았다. dd는 쿠션을 끌어안고 웃으면서, 그러므로 나는 이 사람의 노래를 좋아하지 않고, 굳이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 노래를 이미 많이 들었고, 들을 때마다 이게 뭐야…… 어떻게 이렇게 부드러운 방법으로 노래를 부를 사구 있느냐는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는데도, 매번 행복해진다고 말했다. 이 노래를 듣게 되면 웃긴데, 서글플 정도로 웃긴데, 이상하게 행복해진다……
- 황정은, 『디디의 우산』
연인을 상실한 사람의 회상 앞에서, 그들이 과거에 누렸을 다정스런 시간들에 질투를 느끼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작가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 것 같으나 나는 그 장면을 소유한 적 있는 dd가 몹시도 부러웠다.
그는 와인과 버터 바른 빵과 절인 과일이 든 케이크와 연어와 채 썬 양파가 있는 휴일을 잃었다. 노래를 잃었다, 러브 미 텐더를 잃었다. 우스꽝스러운 부드러움, 그리고 거기서 오는 이상한 행복을 잃었다. 환멸로부터 도망쳐 나갈 구석을 잃었다.
그러나 적어도 잃었다는 건, 가진 적 있다는 뜻이니까. 있지 않음과 없음은 결코 같을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사실은 와인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적막의 반대편에 있는 부드러운 노랫소리, 그런 게 필요한 거였다.
책으로 얼굴을 덮고 바닥에 납작하게 누운 채, 공간을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소리라면- 나에게는 공간이랄 게 없지 않은가 생각했다. 온통 빈약한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생각했다.
당시 나는 한 사람과 지지부진이란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 이후 그 사람을 초대해 따뜻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거나 오래된 영화를 본다거나 하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좀 더 구질구질한 내가 되어 지지부진을 이어나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지지부진마저 지지부진해졌다.
욕망하는 대상이 있을 때에만 외로움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는 게, 당연하면서도 웃기다. 그럴 때 외로움은 팔다리를 가지고 실재하는 것만 같다.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적막 속을 휘젓고 다니는 게 아닐지.
정 와야만 하겠다면 방문 선물로 와인 한 병 챙겨 와주지 않겠니. 러브 미 텐더를 틀어 놓고 다 마시지도 못할 와인 병을 오픈할게. 다행히 코르크를 대체할 실리콘 마개가 있으니, 누군가 치즈와 케이크를 사 오기 전까지 잘 막아놓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