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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무 Jul 04. 2019

나를 먹이고 살리는 일에 대하여

하루와 계절의 루틴


  운동을 끝내고 나면 저녁 늦은 시간이다. 몸의 근육을 한껏 늘이고 당긴 직후라 피곤하기 이를 데 없지만 집에 가기 전 몇 걸음 더 걷기로 한다. 채소와 과일을 사기 위해서다.

  이 동네로 거처를 옮긴 후 가장 좋은 점은 제철을 맞은 채소와 과일을 원하는 만큼, 원하는 때에,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는 거다. 딱 천 원어치, 딱 두 개, 이런 식으로 살 수 있다는 건 입 짧은 1인 가구 구성원에게 아주 큰 장점이다. 걸어서 오 분 거리에 시장이 있다는 것이 나의 생활을 이렇게나 생기 있게 바꿀 줄이야!

  지난 저녁엔 이천 원을 주고 천도복숭아를 다섯 알 사 왔다. 이맘때 볼 수 있는 작고 동그란 여름 과일들은 맛도 맛이지만 향이 예뻐서 지나가다가도 멈춰 서게 된다. 모양이 고운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장바구니에 열매를 담고 달랑달랑 집에 돌아가는 여름밤, 풍겨오는 달큰한 냄새에 얼른 내일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달지 않은 요거트에 과일을 곁들여 먹어야지.



매일 아침 과일들. 내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과일을 먹고 싶어 눈이 번쩍 떠진다.


  아침엔 과일, 저녁엔 채소.


  나의 아침 식사는 일 년 내내 오트밀과 과일이다. 봄과 여름에는 오트밀을 요거트에 밤새 불렸다가 차게 먹고, 가을과 겨울엔 물과 아몬드유를 넣고 데워 먹는다. 전자레인지에 돌려도 상관없지만 냄비에 끓여 먹는 편이 훨씬 맛있다. 한 방향으로 휘저으며 걸쭉하게 만드는 일도 재밌다. 위에 올라가는 과일은 계속 바뀐다. 사과가 맛있을 때는 사과, 청포도가 맛있을 때는 청포도, 딸기가 맛있을 때는 딸기. 요즘엔 천도복숭아와 자두다. 조만간 살구도 곁들여볼 생각이다.

  저녁땐 채소를 굽거나 쪄 먹는다. 요즘엔 햇양파와 양배추, 가지, 단호박과 애호박이 맛있다. 양파는 굽고 단호박은 찐다. 양배추는 어떻게 먹어도 좋다. 애호박과 가지는 구워도 맛있지만 요즘엔 에어프라이어를 이용한다. 이렇게 두꺼워도 익을까 걱정될 정도로 썰어야 식감이 좋다. 아, 물론 오이와 토마토는 주로 생으로 먹는다. 햇감자도 딱 맛있을 시기인데, 혼자 먹기는 내키지 않아 사지 않는다. 감자라면 왠지 한 솥 쪄낸 후 거실에 앉아 다 같이 호호 불어 먹어야 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제철을 맞은 채소는 아주 달다. 은유가 아니라, 정말 달콤한 맛이 난다. 겨울엔 무가 그렇고 여름엔 애호박이 그렇다. 꼭꼭 씹어 삼킬 때 느껴지는 향과 식감과 맛이 재미있다. 여름의 초록들을 보내기가 벌써 아쉽다. 그렇지만 이런 마음은 저번 계절이 지날 때도 그 저번 계절이 지날 때도 느꼈기에, 그저 새로 돌아온 열매와 잎과 줄기와 뿌리들을 반기며 다음 계절을 기다리면 된다는 것도 안다.



  이렇게 아침과 점심과 저녁을 챙기기 시작한 것은 사실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작년 어느 시기의 일기장을 꺼내 보니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저녁을 먹었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어떤 의미이든) 앓을 때마다 음식을 뚝 끊는 안 좋은 습관이 있었고 뱃속이 텅 빈 그 기분이 좋아 몇 날 며칠을 굶고 살았다.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책을 읽으며 많은 날들을 통과했고, 그런 의식들을 거쳐온 결과 걸핏하면 말썽을 일으키는 나약한 위장의 주인이 되었다.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속 쓰림에 양배추즙을 달고 몇 년을 지냈다. 이 사소한 위장 장애가 알게 모르게 날 성가시게 해왔는지, 대충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 후 가장 먼저 실행에 옮긴 일은 시간에 맞춰 적당량의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혼자 살았기 때문에 음식을 먹는 것은 말 그대로 ‘섭식’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도저히 참지 못할 때 허기를 잠재우는 것이 핵심이었다. 맛을 느끼거나 요리를 하거나 하는 경험이 중요했던 적 없다고 해도 아마 틀리지 않을 거다. 음, 쓰고 보니 웃기는 문장이지만 - 열심히 산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기 위해 나는 억지로 달걀을 삶거나 오이를 씹거나 하기 시작했다.


  이왕 결심한 거, 레토르트 식품이나 설탕 가득한 바깥 음식 대신 자연스러운 것들을 먹어 볼까. 재료일 때의 모양과 색을 해치지 않게, 그대로 씹고 삼켜 볼까. 엉망진창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 음식을 먹는 삶이라니, 조금 삭막하지만 그렇게 반년을 사니 몸이 변했고 그렇게 일 년을 사니 생활이 변했다. 동그랗고 순한 삶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생활 안에서 나를 먹이고 살린다는 안도감. 스스로를 위해 시간과 마음을 내고 있다는 만족감. 매일 아침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쓰고 운동을 하려면, 아무렴 뭐라도 먹어야 한다는 걸 조금 늦게 깨달았다. 바지런히 움직이려면 밥을 먹어야 하고, 또 밥을 먹으려면 바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저녁거리를 생각하고 재료를 준비하고 뭔가를 데치거나 볶거나 구워야 한다. 나의 식탁에서 한 벌의 수저를 이용해 한 접시의 음식을 꼭꼭 씹어 삼킨 후 또 달그닥대며 식기를 닦아내야 한다.


나의 저녁 식탁. 퇴근 후 집으로 곧장 가 부산스레 음식을 만들고, 식탁에 앉고, 먹는다!


  오늘 저녁땐 찐 단호박과 달걀을 먹었다. 김이 모락모락 날 때의 단호박은 아주 천천히 씹게 된다. 숟가락으로 폭폭 퍼먹는다. 노른자는 반숙이 취향이다. 나는 아주 예쁘고 맛있는, 이상적인 써니사이드업을 만들 줄 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노른자가 엉망이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먹는다. 다 먹고 나선 대추방울토마토를 몇 알 집었다. 한 소쿠리에 천 원밖에 안 하기에 의심을 품고 사 왔는데, 아주 싱싱하고 단단하다. 달고 맛있다.

오늘도 어찌저찌 일했고 많이 걸었고 그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려 노력했으니, 내게 건강하고 예쁘고 맛 좋은 것을 먹이기로 한다.


  때로는 이 작고 단단한 것들이 나를 자격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순하고 둥그렇게 살아야지, 모든 열매가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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