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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Nov 10. 2022

호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13시간 만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작년 가을 공항에서 코로나 검역 확인 수속을 하는 데 한 시간 이상 걸렸던 기억이 떠올라 도착 안내 표시를 따라 서둘러 걸었다. 다행히 검역을 받기 위해 늘어선 줄은 길지 않았다. 잠시 후 남편과 내 차례가 되었다. 우리는 유리 칸막이 뒤에 앉아 있는 검사원에게 코로나 항원 검사 결과지와 여권 그리고 건강상태 질문서를 칸막이에 뚫린 구멍 안으로 건넸다. 그는 우리가 건넨 서류를 여권과 대조해 보며 코로나 관련 질문을 했다.  나이 든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 쉬운 말로 물어봐주는 그의 배려가 느껴졌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는 남편을 ‘아버님,' 나에게는 ‘어머님'이라 부르며 해외 입국자가 도착해서 해야 할 사항을 알려주었다. ‘아니, 내가 왜 당신 어머니요. 당신 같은 아들을 낳은 적이 없는데.’ 나는 속으로 툴툴거렸고 감사의 마음은 일순간 반으로 줄었다. 이런 호칭을 들을 때마다 내 마음은 불편해진다.  나이에 따라 호칭이 달라지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있을까.  ‘어머님'은 나 같은 연령대의 사람을 부르는 편리한 호칭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모님'이라 부르더니 그새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지 이제는 어머니란다. 그도 나름 예의를 갖춘다고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그래도, ‘댁의 어머니'는 아니라고요!

 

  한 번은 식당에서 메뉴판을 보고 주문을 했다. 내가 시킨 메뉴가 그 계절에는 잘 팔리는 음식이 아니었나 보다. 직원은  ‘엄마, 그건 지금 안돼. 다른 걸로 시켜.’ 뭐 대충 이런 반말 말투였다. 나름 친근감을 보이려 했다고 생각됐지만 황당했다. “왜 내가 댁의 엄마예요?” 나는 그녀에게 퉁명스럽게 내질렀다. 어머니도 아니고 엄마라니.  나를 엄마라고 부른 그 여종업원의 나이도 만만치는 않아 보였다. 염색을 한 새카만 머리와 짙은 화장발로도 그녀가 살아온 세월은 감춰지지 않았다. 그녀는 내 반응에 당황했는지 주문을 받자마자 사라졌고 다른 직원이 와서 서빙을 했다. 아무리 맛집이라 해도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일본말은 악마의 언어다.’ 일본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한 프란시스코 자비에 선교사가 한 말이다. 일본어를 유럽 말로 번역하던 그는 일본어의 복잡한 호칭에 기겁을 해 그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나'라는 일인칭은 상대에 따라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 달라지는데 사투리까지 합치면 10개가 훌쩍 넘는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호칭의 룰이 있음에도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가게에서는 고객의 나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손님'이라 부른다. 관공서나 은행에서는 이름 뒤에 ‘상'(씨)을 붙인다. 일본에서 생활할 때 백화점에서 쇼핑하며 겪은 일이다. 계산을 하고 물건을 받으려고 하니 점원은 내가 산 물건이 들어있는 쇼핑백을 들고는 매장 입구까지 가서 공손히 절을 하며 건넸다. 고가품을 산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 대접을 받으니 쑥스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후로도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했는데 겸연쩍기는 마찬가지였다. 공손한 행동으로 고객을 대하는 일본 종업원과 호칭으로 친근감을 표시하는 한국 종업원이 같은 상품을 판다면  나는 전자를 택하겠다. 왜냐하면 내가 필요한 것은 적절한 서비스이지 가족 같은 친밀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편은 30여 년 간 미국 회사에서 근무했다. 한국 기업과 달리 외국 기업에서는 사내에서 보통 직책 대신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사장도 말단 사원도 성을 뺀 이름으로 통한다. 외국기업에서 일하는 한국인 중에는 영어 이름을 만들어 쓰는 사람이 많다. 남편은 영어 이름 대신에 본인 이름의 첫 자음을  따서 불리는 방식을 택했다.  예를 들어 김철수라고 한다면 철수의 영문표기인 CHEOL SOO에서 한 글자씩 딴 CS, 즉 ‘씨에스’가 되는 식이었다. 한국 이름이지만 영어식으로 들려서 외우기가 쉽고 발음이 정확한 장점이 있었다.  배우 윤여정씨가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 조연상을 탔다.  수상 소감에서 여정씨는 미국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고 뼈 있는 농담을 했다. (성이 뒤에 오는 미국식 호칭 ‘여정 윤'은 세 글자 모두 ‘ㅇ'이 들어있어 정확하게 발음하기가 한국인도 쉽지는 않다.) 그랬던 여정씨가 올해 남우조연상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다민족 출신 후보자들의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듯하다.  그녀는 본인의 이름을 잘못 발음하는 미국인들의 실수를 꼬집은 것에 대해 사과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아들은 영어 이름이 없다. 아들의 이름은 두 글자 중에 뒷글자의 받침이 ‘ㄱ'으로 끝나 미국인이 제대로 발음하기가 까다롭다. 녀석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면 닉네임으로 이름 중의 첫 글자로 본인을 소개한다. 영어 이름을 만들지 않은 이유를 물어보니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이름은 내 정체성이기도 하니까.”라고 했다. 올해 여름, 아들을 볼 겸 여행겸 샌프란시스코에 갔다가 ‘블루보틀'이라는 커피숍에 들렀을 때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블루보틀'은 샌프란시스코의 옆 동네인 오클랜드에서 작은 커피숍으로 시작했다.  블루보틀에서 주문을 하면  ‘May I have your name?’이라 묻는다. 주문 순서대로 커피를 만들다 보니 차례가 되면 이름을 불러 커피가 준비됐음을 알리기 위함이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든 같은 질문을 하고 컵에다 이름을 적는다. 사실 영어 이름만으로는 그 사람의 국적이나 인종을 추측하기가 어렵다.  ‘마이클'이라는 이름이 호명되고 커피를 찾아가는 사람을 보면 아시아인일 경우도 많다. 나는 주문을 하고 ‘K-I-M, 킴'이라 답한다. 처음에는 이름(first name)을 댔더니 몇 번이고 되묻고 해서 이제는 킴이라 한다. 그러면 점원은 한 번에 알아듣고 컵에 KIM이라 적는다. 아들은 진짜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말한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커피숍에서 큰소리로 본인의 이름이 불리는 게 불편해서란다. 그 말을 들으니 일리가 있어 나도 해봐야지 했다가 아직 못했다. 가명부터 생각해 봐야겠다.


  나보다 젊은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들은 거의 이구동성으로 나를 선생님이라 부른다. 선생님이란 호칭은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지면 ‘언니' 같은 좀 더 친숙한 호칭으로 바뀐다. 연배가 비슷해도 마찬가지다.  선생님은 무난한 호칭 같다.  누가 들어도 존중받는다는 느낌이 있고 왠지 학식이 있어 보인다.  한 번은 카페에서 중년 남자들의 옆 테이블에 앉게 됐다. 그들은 서로를 김 박사, 이 회장, 박 교수라고 호기롭게 부르며 대화를 했다. ‘와, 대단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네'라고 생각했다. 농으로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물론 그 김 박사가 정말 제대로 된 박사학위 소지자였는지도 모른다. 내 영어 이름은 ‘한나’다. ‘현희'라는 이름이 외국인에게는 발음하기가 까다로워  ㅎ로 시작되는 단어를 찾다 성경 속의 ‘한나’가 떠올라 따라 했다.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그녀처럼 외아들이 있다.) 외국에서 나는 한나면 통했다. 친구들도 나를 한나라 했고 남편 회사 직원들도 한나라 불렀다.  한국에 오니 나는 상황에 따라 선생님, 대표님 혹은 피 한 방울 안 섞였음에도 이모나 언니, 어머니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 먼저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라고 묻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한국에서 호칭은 불리는 사람의 의사보다는 부르는 사람의 마음대로 선택되는 것 같다. 아니면 불리는 사람의 의중을 미리 살펴 그러한가. 잘 모르겠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일상이 떠올랐다. 한여름의 샌프란시스코는 오후 8시가 지나도 밖이 환했다. 푸르디푸른 하늘을 붉은빛으로 물들이며 지는 석양은 울컥할 만큼 아름다웠다. 공원에는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가족, 조깅하는 사람들이 코로나의 존재를 잊은 듯이 유유하게 자연을 즐기고 있었다.  잔디에 앉아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다  남편과 나는 늦은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을 들어갔다. 손님들은 마스크를 벗은 채 자유롭게 담소하며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를 본 종업원이  “Hi, How are you?”  하며 미소 띤 얼굴로 맞이했다.  ‘YOU!’ 그 단순하고도 확실한 호칭이 새삼 그립다.

                                                               (202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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