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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Nov 16. 2022

추수감사절

2000년 11월 추수감사절이 다가왔다.  1년 동안의 수확물과 추수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말로만 듣던 미국 최대의 명절을 휴스턴으로 이사 와서 처음 맞이하게 됐다. 한 달 전부터 신문과 텔레비전은 추수감사절에 관한 기사와 방송으로 분위기를 띄웠고 슈퍼마켓의 정육코너에는 칠면조 고기가 쌓였다. 시끌벅적한 명절 분위기는 한국과 다를 바 없었다. 사람 사는 곳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해 보였다.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어떻게 보낼까 하고 있던 차에 채터누가에 사는 친구가 자기 집에 초대를 했다.  때맞춰 샬롯트에 사는 남편 친구도 명절을 같이 지내자고 연락을 해왔다. 지도를 보니 집에서 노스캐롤라이나의 샬롯트까지는 차로 21시간이 걸리고 거기서 테네시주 채터누가는 500킬로 떨어져 있었다.  한 번의 여행으로 양 쪽 모두 방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당시 우리 차는 8인승 미니밴이었는데 남편은 뒷좌석을 떼어내 그 자리에 매트를 깔아 누울 자리를 마련했다.  말희(반려견)는 개 호텔에 맡기고 아들 방에서 키우던 게코도마뱀은 데리고 가기로 했다. 옷가방 외에 슬리핑백, 쌀, 전기밥솥과 휴대용 전기 곤로를 챙기고 김치랑 밑반찬을 아이스박스에 넣었다. 장거리 자동차 여행은 처음이라 행여나 하는 마음에 주섬주섬 싸다 보니 10일간의 여행 준비물은 피난민 살림처럼 차 한구석에 가득 쌓였다.


  구글맵이 개발되기 전,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이었다. 미국 전체를 볼 수 있는 한 장 짜리 지도와 도로 표지판에 의지해 주와 주를 이동하고 도착지가 가까워지면 아틀라스 지도책을 보며 운전했다. 아틀라스 지도책은 그 당시 미국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동차에 한 권씩 구비해 놓았던 운전자용 책이었다.  운전은 주로 남편이 했는데 피곤하면 나에게 부탁했다. 그럴 때마다 “걱정 마.” 호기롭게 말은 했지만 실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이 무서웠다. 출구를 놓치지 않으려고 긴장하여 운전한 탓인지 한두 시간 만에 몸은 그로기 상태가 되고 말았다. 밤이 되어 우리는 고속도로 주변 모텔에서 하룻밤을 잤다.  모텔방에서 나는 전기밥솥에 밥을 하고 욕실에서 휴대용 전기 곤로에 김치찌개를 끓였다. 찌개 냄새가 방 밖으로 새지 않도록 젖은 수건으로 문틈을 메웠다. 나는 변화를 즐기고 도전을 좋아하지만 혀만큼은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내 정서 밑바닥에 인 박여있는 한국음식은 객지에서 부유하는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자 안식처였다. 묵묵히 운전하는 남편에게 돼지고기를 듬뿍 담아 내 마음을 전했다. 인도인이 살던 집엔 카레 냄새가 배어있다는데 우리 가족이 하룻밤을 지낸 모텔방에서는 다음 날 아침 체크아웃할 때도 쉰 김치 냄새가 심하게 났다. 미안한 마음에 팁을 넉넉히 놓고 나왔다.  


  남편 친구 스티븐은 대학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었다.  그는 다니던 미국 회사를 그만두고 누나와 주유소를  했다. 어릴 때 미국으로 건너간 그의 아내는 간호사였다. 주로 야간 근무를 하는 캐리를 대신해 근처 사는 스티븐의 누나가 우리를 식사에 초대했다.  덩치가 한 줌밖에 안 되는 그녀는 종갓집 맏며느리처럼 품이 컸다. 삼 박 사일을 먹어도 못다 먹을 양의 갈비와 고명을  잔뜩 얹은 냉면을 내놓는데 입이 쩍 벌어졌다. 이국에서 한가위 상을 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동생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초면인 우리를 위해 풍성한 밥상을 마련한 누나의 정성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서울에서 미대를 졸업한 누나는 입담도 좋았다. 트레일러에 살면서 남의 집 청소와 미술학원 알바로 투잡을 뛰며 남편 학업 뒷바라지와 생계를 꾸려간 이야기를 하도 맛깔나게 해 우리를 웃겼다. 하지만 남의 땅에서 뿌리내려 자리 잡을 때까지 고됬을 삶을 상상하니 가슴 한켠이 아렸다. 하루는 친구 집에서 영화 <미션 임파서블> 비디오를 빌려다 다 같이 봤다. 대학과 대학원을 미국에서 나오고 미국 회사를 다닌 스티븐은 빠른 템포의 할리우드 액션 영화는 알아듣기 힘들다며 막히는 대사가 나오면 그의 부인에게 물었다. 외국어는 어릴  때 익히고, 영화는 같이 봐야 재밌다는 사실을 그때 확실히 알았다. 직장생활에 지쳐있던 남편은 모처럼 친구와 허물없이 학창 시절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즐거워했다.  나흘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스티븐은 며칠 더 지내다 가라고 우리를 꼬드겼다. 남편은 내심 그러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을 내 친구를 생각하니 가야 했다.  인정 많은 스티븐네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우리는 채터누가로 향했다.


  크리스틴은 홍콩 살 때 알게 된  친구다. 우리는 같은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아들이 크리스틴의 두 딸과 같은 프랑스학교를 다녔다.  그녀는 내가 불어를 조금 배웠다고 하자 불어를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레슨비로 한 번에 만원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돈이 목적이 아닌 크리스틴은 내 부담도 줄여주고 본인도 책임감을 느끼려고 했던 것 같았다.  동갑내기였던 크리스틴에게 불어를 배우며 친해졌다. 크리스틴은 생각이 깊고 검소하며 멋을 아는 여자였다. 그녀가 새 옷을 입은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지만 그 집에 가면 언제나 탐스럽게 장식된 꽃이 나를 맞았다. 내가 살던 아파트 동 위층에는 날리나란 인도인이 살았다. 그녀는 인도 남부 폰디체리가 고향이었는데 그곳은 영국이 지배했던 다른 지역과 달리 프랑스 식민지였다. 날리나 가족은 불어가 일상어에다 국적은 프랑스였다. 날리나의 외아들도 프랑스학교를 다녔다. 같은 아파트에서 살며 아이들도 같은 학교를 다녔던 우리 셋은 자주 만나 함께 점심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 무렵 나는 천주교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나 어쩌다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남편과 아들은 교회를 나갔다. 대신 가끔씩 남편과 아들이 다니는 교회에 갔고 그들도 한 번씩은 내가 다니던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크리스틴도 나와 비슷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남편은 일요일이면 두 딸과 성당에 갔다. 신자가 아니었던 크리스틴은 가톨릭 교인이 되기를 원했던 큰 딸의 대모가 돼 달라며 나에게 부탁했다. 새내기 신자가 대녀를 맞이한다는 게 부담스러웠으나 그녀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델레이드를 하느님이 주신 딸로 기쁘게 받아들였다.  얼마 후 크리스틴 가족은 그녀 남편의 새 부임지인 미국으로 떠났다.


  저녁 무렵에 도착한 우리는 푸들이 뛰어다니는 이 층 저택에 들어서서야 ‘진짜’ 미국집에 왔음을 실감했다. 한국식의 뜨신 환대에 빠져있다 깨어보니 낯선 대륙 한가운데 서있는 기분이었다. 이 년 만에 보는 크리스틴은 한층 멋스럽고 여유로워 보였다. 집안에는 고소하고 향긋한 버터와 허브 냄새가 났다. 식탁 위에는 붉은 가을꽃이 센터피스로 장식되어있었고 일인용 자기 접시, 커트러리와 냅킨이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스티븐 누나가 본인 식사는 뒷전으로 미루고 쉴 새 없이 주방을 드나들며 음식을 해 나르던 샬로트와 달리 이 곳에서는 길고 넓은 식탁에 정통 추수감사절 요리가 펼쳐져있었다.  우아하게 접시 위에 자리 잡은 칠면조 고기를 포크와 나이프로 도륙을 하려니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우리는 홍콩 시절을 회상하고 미국 생활을 이야기하며 와인잔을 부딪혔다. 프랑스학교가 없는 채터누가에서 친구의 두 딸은 미국 학교를 다녔는데 집에서는 철저히 불어를 했다. 크리스틴은 아이들이 영어로 말하면 대꾸하지 않았다.  반면에, 내 아들은 미국 온 후로는 그나마 알고 있던 한국어를 잊어가는 중이었다. 집에서는 한국말을 썼지만 영어에 대한 목마름이 있던 나는 오히려 아들에게 영어로 답하거나 말울 걸었다. 모국어에 대한 부심이 가득한 친구와 다르게 나는 한국인이란 자부심이 그 시절에는 별로 없었다. 노오란 백열등 불빛으로 운치 나는 넓은 집은 우리 가족에겐 썰렁했다. 양말을 신고 담요를 겹으로 덮어도 으스스해  나는 남편을 난로 삼아 껴안고 잤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체감온도가 다른 이유는 밀가루로 만든 빵을 주식으로 하면  피부를 두껍게 만들어 추위에 강하게 되고 쌀을 먹으면 피부가 얇아져 추위를 타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샬로트 집과 온도차가 5도는 나는 것 같았다. 이틀 내내 크리스틴 가족과 영어로 말하며 시내 관광을 하다 보니 몸과 머리가 지쳤는지 그다음 날은 추운 줄도 모르고 뻗어서 잤다. 나는 크리스틴과 포옹하고  프랑스식 뽀뽀를 했다. 그리고 작별했다.  크리스틴은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문 앞에서 서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달라 보였다. 같은 여정이었지만 무섭지도 멀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새 간이 커졌는지 주위를 돌아보며 한 손으로 운전하는 여유까지 생겼다. 샬로트와 채터누가에서 받은 환대를 생각했다. 철철 넘치는 음식과  ‘우리가 남이가’란 마음으로 친구 가족을 따뜻이 맞아준 스티븐네. ‘우리는 남이다’ 그러니까 ‘네 프라이버시를 존중할게라는 크리스틴. 체감온도가 서로 다른 이들의 공통분모는 ‘진심’이었다.  2000년 추수감사절은 그 진심에 대한 감사함으로 행복했던 명절이었다.  참, 귀향길에 한국 식당에 들러 쌀밥과 된장찌개로 입과 위를 다스린 이야기를 빠뜨릴 뻔했다.


(202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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