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에 살면서 내 삶에는 두 가지의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하나는 태어난 지 6주 된 말희를 입양하여 키우다 4살 되던 해에 먼 길로 떠나보낸 것. 다른 하나는 외아들이 대학에 진학하느라 집을 떠난 것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말희와 산책하고 아들을 깨워 학교에 보내면서 하루를 보내던 내 일상은 그들의 부재로 멈추었다. 남는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한 시간 운전하면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에 다다를 만큼 작은 나라인 카타르에서는 할 거리가 마땅치 않았다. 어쩌다 시내를 혼자 걷다 보면 외국인 노동자들의 강렬하고도 끈적거리는 시선이 느껴져 불편했다. 세계에서 제일 부자 나라인 카타르는 외국인이 인구의 3/4를 차지했는데 대부분이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상황적 집순이가 되어 종일 텔레비전 리모컨만 눌러댔다. 어느 날 텔레비전 화면에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 모습이 보였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해 후세인을 생포했는데 그에 대한 재판 생중계 중이었다. 아랍어가 난무하는 법정은 소란스러웠다. 군복을 입은 콧수염의 후세인이 뭔가 열심히 항변했다. 재판은 매일 열렸다. 강한 억양의 아랍어를 듣고 있자니 야성미 넘치던 안서니 퀸의 영화 <올리비아 로렌스>가 떠올랐다. ‘그래, 이거야, 아랍어!’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카타르 대학교를 찾아갔다. 2005년 무렵이었다.
카타르 대학은 캠퍼스가 남녀 구분이 되어있고 외국인 상대의 어학당은 남학생 캠퍼스에 있었다. 한 건물에 들어가 학교 관계자인 듯한 사람을 붙잡고 아랍어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는 친절하게도 나를 어느 사무실로 안내했다. 정직하고 후덕한 인상의 그 사무실의 주인은 불어로 내게 말을 걸었다. 당연히 영어가 나오리라 생각한 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는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불어권의 나라에서 온 아랍어 선생이었다. (나라 이름을 잊어버렸다.) 젊은 시절 배웠던 몇 단어의 불어로 나의 목적을 간신히 설명했다. 진지하고 참을성 있게 내 말을 경청한 압둘라 선생은 청강생으로 나를 받아주었다. (알고 보니 아랍어 학당의 학장이었다.) 운도 좋았다. 수업 첫날 강의실에 가니 수강생은 나를 포함하여 네 사람. 그중 세 명이 한국사람이고 모두 청강생이었다. 카타르 항공 승무원, 선교사 그리고 나. 나머지 한 사람은 미국인 마이클. 유일한 정규 학생이었다. 마이클을 위해 만들어진 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 듀크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마이클은 당시 카타르 국왕(지금 왕의 아버지) 딸인 마야사와 같은 과였다. 공주는 국제정치에 관심이 많은 마이클에게 자기 나라에서 아랍어를 배우며 아랍 문화를 접하기를 제안했다. 엄청난 백으로 카타르에 온 마야사 동창은 학교가 제공하는 숙소에 지내면서 각종 특혜를 받았다. 아랍어 수업은 물론 집과 학교 간 차량 제공, 용돈, 미국 카타르 왕복 항공권 등. 마이클은 가끔 왕궁에 초대됐는데 그럴 때면 우리에게 은근히 과시했다. 하루는 수업이 끝나고 마이클이랑 점심을 먹으러 갔다. “새우요리가 오늘 추천 메뉴네. 시킬까?” 하니 “ 나 새우 못 먹어.” 하는 것이었다. “ 그래? 알레르기가 있어?” “ 아니, 그냥 생긴 게 징그러워서.” 미국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런 모지리 범생이 있나'라고 속으로 비웃었지만 창백한 피부톤에 까탈스럽게 생긴 외모를 보면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사 새우 그 까이꺼 못 먹으면 어떠랴. 카타르 공주 연줄이면 살기가 얼마나 편할 텐데. 복 많은 마이클은 일 년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지금쯤 미국에서 저명한 아랍권 전문 정치학자가 되었으려나.
어느 날 캠퍼스에서 동양인 두 사람이 눈에 띄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들에게 다가갔다. 한 사람은 이십대로 보였고 다른 한 사람은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였다. 그런데 그들의 옷깃에 김일성 배지가 달려있었다. 빨간 바탕에 김일성 얼굴이 선명하게 돋보였다. 난생처음 보는 북한 사람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겁도 났다. 어린 시절 세뇌된 ‘철천지 원수'를 눈앞에서 갑자기 맞닥뜨리니 가슴이 콩당거렸다. 나도 모르게 “안녕하세요.”라는 인사가 나왔다. ‘아, 안녕하세요" 그중 선글라스를 낀 젊은이가 답례를 했다. “무슨 일로 이곳에?” “ 네, 아랍어 배우고 있어요" “아, 그러세요 저도 배우는데 무슨 반이세요?” “ 상급반입니다." “저는 초초급반인데 아랍어를 잘하시나 봐요.” “대학에서 아랍어를 전공했습니다.” 그들은 북한 외교부 소속으로 아랍어를 배우러 온 유학생들이었다. 다시 말해 북한 외교관들이었다. 학교 기숙사에서 지낸다고 했다. 그들은 나랑 다를 바가 없었다.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음식을 먹는 내 이웃이었다. 이런 이웃과 50년 이상을 절연하며 지냈음에 가슴이 아팠다. 이데올로기가 그렇게 중한 것인지. ‘식사는 드실만해요?”하고 물으니 “괜찮습니다." 젊은 북한 학생이 순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조선사람은 김치와 고추장 힘으로 사는데 기숙사에서 주는 밥이 입에 맞을까 하는 안쓰러움이 들었다. “언제 한국 식당에서 식사라도 같이 하시죠" 했더니 얼버부리며 말을 삼켰다. 그날 이후 내가 뱉은 말이 걸렸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사는 남자의 보편적인 후줄근함인지, 가난이 몸에 들러붙은 구질함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헷갈리는 그들의 외모에서 측은지심을 느꼈다. 며칠 뒤 나는 그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서성댔다. 그들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수업 끝났어요?” “ 네. 지금 기숙사로 돌아가려구요.” “저, 이거" 나는 고추장과 라면을 내밀었다. 청년은 당황해하며 나이 든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던지듯 안겨주며 ‘별거 아니에요. 심심할 때 드세요' 하고는 돌아서 뛰다시피 했다. 내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그들은 언제나 붙어 다녔다. 일탈을 못하도록 항상 조를 이뤄 다니는 간첩영화 장면이 떠올랐다. 아랍통 외교관으로 활약 중일 그들의 이름이라도 기억해 둘 걸 그랬다.
일 년 후 나는 다음 단계로 올라갔다. 마이클과 공부하던 때와는 180도 다른 수업 분위기였다. 수강생 모두 무슬림 나라에서 유학 온 ‘진짜’ 학생들이었다. 전부 여자였다. 검은 아바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치고 있어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이들 중에 크리스틴이란 미국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다니던 대학에서 카타르에서 온 유학생과 사랑에 빠져 무슬림으로 개종했다. 카타르에 와서 결혼식을 하고 아랍어를 익히러 어학당에 온 것이었다. 알고 보니 크리스틴도 나처럼 청강생의 신분으로 학교에 다녔다. 수업이 끝나면 스쿨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가야 하는 다른 유학생과 달리 자유로웠던 나와 크리스틴은 여자 캠퍼스로 건너가 그곳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는 했다. 여자 캠퍼스는 남자 출입금지라 여학생들은 자유로이 얼굴을 내놓고 다녔다. 여자만의 세상은 바깥에서 보는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아바야를 벗어젖힌 그들은 대담했다. 짙은 화장에 귀보다 크고 화려한 귀걸이, 값비싸 보이는 드레스로 한껏 멋을 부린 대학생들은 지들끼리 깔깔대며 풋풋한 젊음을 발산하고 있었다. 반면, 크리스틴은 다소곳했다. 결혼을 해서 그런지 그들과 비슷한 나이임에도 성숙해 보였다.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고 행동도 조심스러웠다. 누가 무슬림 여성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한동안 수업에 열심이던 크리스틴은 임신을 하면서 학교를 휴학했다. 그녀와 한동안 이메일로 소식을 주고받다 서서히 연락이 끊겼다. ‘사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끊겨진다’는 어느 시를 본 적이 있다. 모든 걸 버리고 아랍 사내를 택한 크리스틴의 사랑이 벼락이 아닌 활화산이 되어 현재 진행형이면 좋겠다. 주렁주렁 자식에 둘러싸인 크리스틴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지금 카타르에서는 월드컵 경기가 벌어지고 있다. 2009년 카타르가 2022년 월드컵 개최국으로 결정됐을 때만 하더라도 설마 했다. 내가 살던 당시에 카타르의 도하공항은 짐을 내리는 컨베이어 벨트가 3개밖에 없었다. 그랬던, 지도에도 잘 보이지 않는 나라가 수많은 돈과 시간과 목숨을 들여 세계의 스폿트 라이트를 받고 있다. 내가 매일 걸었던 도하의 알 코니쉬 해안가에서 영국의 미남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이 월드컵 광고를 찍었다는 뉴스를 봤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십오 년이 지난 지금 내 머리나 혀에 남아있는 아랍어는 거의 없다. 어디 가서 아랍어 공부했다 말하기도 민망하다. 나이 들어 익힌 외국어는 배운 햇수에 비례해 잊어버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이 맞는 듯하다. 삼 년 동안 배웠으나 그만큼의 시간이 흐르니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듯이 사라졌다. 세월과 함께 잊힌 내 안타까운 아랍어다. 하지만 ‘어쩌다 카타르’가 아닌 ‘카타르였기 때문에’ 기꺼이 모험을 무릅쓴 이들과 함께 공부하며 지낸 날들은 내 인생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신영복 선생의 말씀이 생각난다. ‘ 만남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겸손한 자세로 다가가는 것뿐이다, 내 잣대로 평가하고 함부로 재구성하는 것은 오만이며 삶과 역사에 대한 무지다. 그들은 저마다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또 살아간다. 모든 것은 그 세월의 최선이었다.’ 그들의 선택에 후회 없길 바라며 어디서 무얼 하든 행복했으면 좋겠다. (202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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