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떠나도 괜찮아요.
두 달 전에 유방암을 진단받은 그녀가 말했다. 혈압약을 타러 삼여 년간 약국에 오던, 나와 동년배의 환자였다.
“네?”
남편은 오 년 전 지병으로 먼저 떠났고, 아이들은 모두 결혼해 미국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떠나도 아쉬울 것이 없다고,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너무 놀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얼결에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이런 것이었다.
아직 나이가 아깝지 않으냐고. 칠십도 안 되었고,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냐고. 힘닿는 한 병과 싸워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내 말이 그녀에게 어떤 위로가 되었을지, 혹은 상처가 되었을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이 불편해진 채로 그녀는 작별 인사를 하고 약국을 나섰다.
예순 중반을 넘기며 나는 많은 이별을 겪었다.
양가 부모님, 친구들, 남동생까지. 부모님을 보내드릴 때는 큰 슬픔은 있었지만 당혹감은 없었다. 먼저 세월을 사신 분들이니 먼저 가시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내가 해야 할 일은 잘 보내드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팔 년을 자매처럼 지낸 친구가 병으로 먼저 갔을 때는 달랐다. 부모님 때보다 더 슬피 울었다. 함께 보낸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라 가슴이 조각나는 것 같았다. 마흔도 되지 않아 남편과 딸을 두고 떠난 삶이 애잔했고, 남겨진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때 처음으로, 친구가 먼저 간다는 것은 곧 나도 갈 수 있다는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쉰을 앞둔 남동생이 사고로 갑자기 떠났을 때는 슬픔보다 당혹감이 컸다. 나보다 한참 어린데, 살아야 할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열 살이나 아래인 동생의 죽음은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는 사실을 내게 일깨워주었다. 그 충격은 오래도록 마음을 괴롭혔다.
약국에서 환자들을 만나다 보면 인사 없는 이별을 자주 겪는다.
매달 심혈관계 약을 타러 오던 어르신이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으면, 대개는 대학병원에 입원했거나 요양원에 들어간 경우다. 그곳에서 쓸쓸한 시간을 보내다 조용히 저승으로 간다.
요즘은 젊은 나이에 암을 앓는 환자도 많다. 병원에 가보라 권유했던 환자가 자궁암 3기로 진단받고 수술을 마친 뒤 고맙다며 화분을 들고 온 적도 있다. 항암치료로 머리가 빠지면서도, 혹은 완치 판정을 기다리며, 사람들은 모두 살기 위해 애쓴다. 그래서 더욱, 죽음을 이렇게 담담히 말하던 그녀의 태도에 공감하면서도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가족이라는 끈이 끊어지면 삶의 의욕도 함께 사라지는 걸까.
나라는 존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 걸까.
가족이 있어야만 살아갈 이유가 생기는 존재일까.
아마도 그런 질문들이 겹치며, 나는 무심결에 그녀의 말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 같다.
떠나도 괜찮은 시간은 언제일까.
그 질문은 죽음을 허락해도 되는 순간을 묻는 말 같았지만, 실은 삶을 어디까지 감당할 것인가를 묻는 말이었다.
아이를 낳았을 때의 나는 살아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젖을 먹다 말고 나를 올려다보던 아이의 눈앞에서, 삶은 선택이 아니라 책임이었다. 그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나는 아파서도, 물러서서도 안 되는 존재였다.
그 마음이 옅어진 것은 예순을 넘기면서부터였다. 아이들은 제 삶으로 흩어졌고, 내 손길을 꼭 필요로 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돈에 대한 욕심도, 더 오래 살고자 하는 욕심도 서서히 힘을 잃었다. 인생이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말이 이해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 언제 떠나도 마음 편할 수 있는 나이에 서 있다. 그럼에도 그날 약국에서 나는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떠날 이유가 충분해 보일수록, 삶이 너무 쉽게 정리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고 해서, 삶 자체의 무게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라는 끈이 느슨해져도, 삶은 여전히 한 사람에게 온전히 주어진 몫으로 남는다.
백세 시대라지만, 아프게 오래 사는 것보다 숨이 편한 시간을 살다 가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래서 더더욱 남은 시간은 ‘언제 떠나도 되는 시간’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내다 떠날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일 것이다.
그녀에게 했던 말은 결국 나 자신에게 돌아왔다.
아직 아깝다는 말.
아직은 아니라는 말.
살아 있는 동안만 할 수 있는 일들이 남아 있다는 말.
이제 나는 안다.
떠나도 괜찮은 나이는 없다는 것을.
삶은 언제나 끝낼 만큼 가볍지 않고,
견뎌낼 만큼만 조용히 우리 앞에 놓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