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걸음으로

느림 핑의 독백

by 릴리안

난 느리다. 그걸 처음 자각한 것은 학교라는 집단에 들어가고 서부터다. 한 반에 거의 백여 명의 학생이 같이 공부하고 뛰놀고 도시락을 먹던 초등학교.

체육시간에 달리기를 하면 항상 맨 끝으로 들어오고

점심시간에 아이들은 다 먹고 운동장에서 놀 때, 난 도시락통을 부여잡고 허둥지둥 밥알을 억지로 삼켰다.

행동이 굼뜨고 느린 건 학교라는 단체 생활에서 늘 낙오자라는 딱지가 붙는다. 못마땅한 눈빛으로 날 내려보는 선생님들의 눈빛이 끔찍이도 싫었다.

경쟁이 치열한 시대를 살면서 난 늘 허덕이며 남들의 시간에 맞추어 뛰기 시작했다.

만원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숨찬 걸 참아가며 뛰어가 올라타고

입시에 실패하지 않으려고 약한 몸으로 늦게까지 공부했다.

남들과 비슷한 시기에 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이른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들도 낳았다.

집 장만도 해야 하고 아이들 입시도 치러야 하고 남들처럼 비슷하게 사느라 항상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근무약사 시절 조제실에선 같은 약사들과 조제건수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내게 할당된 조제약은 정확하고 빠르게 해야 다른 약사들에게 누가 되지 않는다. 자동포장 조제기가 나오기 전에는 모든 조제에 약사의 빠르고 정확한 손길이 필요했다. 다른 약사와 경쟁이 되지 않는 다는걸 안 후로 투약담당을 지원했다. 환자에게 전문약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복약지도를 담당하는 자리였다. 규모가 큰 약국이라 업무가 분할되어 다행히 나의 약점이 노출되지 않고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개업을 하고 내 약국을 차리니 문제가 간단치가 않았다.

약사가 혼자이다 보니 조제하랴, 일반약 상담하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처방전이 서너 장 쌓이다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장기처방까지 같이 오면 조제실은 마치 어질러진 주방처럼 엉망이 된다.

더구나 기다리다 지친 환자들의 불만소리가 귀에서 들리다 보면 어린 날의 트라우마가 떠올라 손이 후들거릴 때도 있었다.

그럴 땐 준비를 완벽히 해놓은 방법밖에 없다.

자주 나오는 시럽을 미리 따라 놓고, 예제를 준비해 놓고, 포장된 알약을 조제하기 좋게 까놓고…..



그러다 사무직을 돕던 직원이 그만두게 되었다.

이제 난 약사의 일에 직원이 하던 일까지 같이 하게 되었다.

약값 계산에, 청소에, 매장 정리까지. 예전 같으면 절대 혼자선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이젠 다 나 혼자 해야만 한다. 소아과 환자가 많이 줄어 조제량이 줄기는 했지만 내가 과연 이 체력으로 이 일을 혼자 다 할 수 있을까?

인생은 시험의 연속이라더니 기다리다 가는 환자가 있더라도 우선 나 자신을 시험해 보기 위해 혼자 해보기로 했다.

약값 계산은 바코드. 스캐너가 있으니 그걸로 하면 되고

가루약 조제는 산제 조제기가 있으니 파우더로 갈아 기계를 이용하면 되고

장기 처방 환자는 처방 변경이 없으면 여유 있을 때 미리 지어놓고…..

화, 목 오전은 옆 병원 휴진이니 시간이 걸리는 작업은 그날 해놓고….

내 걸음이 느리니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해놓고

천천히 나만의 걸음으로 가자.

남들과 똑같이 하느라 허덕이지 말고 나의 속도로

일을 처리해 보자.


그렇게 나 홀로 어언 일 년 여의 시간이 흘렀다.

물론 힘들 때가 없던 것은 아니다. 오늘은 이 약국을 습격해 볼까? 하고 모든 환자가 한꺼번에 오는 시간이 있다. 평소 단골이던 환자에, 신환자에, 낯선 병원의 처방전까지 몰리는 날이다. 그럴 땐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순서대로 차근차근 일을 진행한다. 그러다 보면 하나 둘 환자들이 사라지고 약국은 곧 고요해진다.


빠르게 하겠다고 나 자신을 볶는 대신에 자신의 속도로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생겼다. 젊음과 민첩함이 사라진 대신 사물을 느긋이 바라보며 원숙한 마음으로 대하게 되었다. 환자들도 독촉하는 대신 느긋이 기다리는 분이 더 많아졌다. 이젠 나만의 걸음으로 일을 처리하는데 자신이 생겨간다.


흑백요리사의 우승자 최광록 씨를 보면 나와 결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느린 행동, 어눌한 말씨,

얼핏 보면 속도를 중요시하는 요즘 세태에 어울리지

않지만 진정한 그의 실력과 걸음걸이로 우승자가 되었다. 그의 우승으로 느림 핑도 당당하게 세상에 나서는 시대가 된 것 같아 고맙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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