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가 있었다. 첫 조카.
이모가 되지 않아 '모모'라 부르던 아주아주 많이 예뻤던.
17살이었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 아이가 내 다이어리를 만지작거리자 홱하고 낚아채 버렸다.
그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온 언니와 눈이 마주쳤고 셋은 모두 경직됐다.
왜 이 기억만 선명하고, 왜 그렇게 미안한지 모르겠다.
어지르면 얼마나 어지른다고 내가 그 어린 손에서 낚아챘을까. 내 사춘기가 뭐 그리 대단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상대로..
모른 척 넘어가는 언니, 규리의 엄마는 나에게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고 이후에도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집으로 돌아갈 날짜가 계속해서 늦춰졌다.
형부의 군부대에 일이 생겨서, 세 번 만에 내려가는 날짜가 정해지고 그날은 군대 후임이 가는 길에 내려달라 부탁을 해왔다.
언니는 규리를 안고 조수석에, 나와 후임은 어색하게 뒷좌석에 자리 잡았다.
날은 흐렸고, 좁은 시골길 모퉁이를 돌아 저 멀리 집이 보였는데 이상했다.
어릴 때 몇 번 봐왔던 모양새였는데, 그 길 끝자락에는 삼베옷을 걸친 상주 두 명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문득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 왜 그랬는지 모른다.
'왠지 사고 날 것 같다..'
눈을 떠보니 전복된 차 안, 뒤집어진 상태로 유리파편이 쏟아내려 져 있었고 두 번째는 앰뷸런스 안, 그리고 응급실.
마지막으로 정신이 들었을 때는 3인실 병실이었다.
형사가 다녀갔고 우리는 술 취한 운전자의 봉고차량을 피하지 못해 봉변을 당했다고, 사고를 낸 차량의 주인은 즉사했다고 들었다.
규리부터 찾았다.
소식을 듣고 군부대에서 지원을 나와주셨다. 안경도 깨지고 흐릿한 눈을 하고 옆에 앉은 아무나 붙잡고 규리의 사정을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한 여성분이 울지 말라는 약속과 함께 입단속을 시켰다. 끄덕였다.
규리는 제일 먼저 대학병원 응급실로 이송됐고, 우린 이 병원으로 오게 되었다고.
아마 머리를 다쳐 예후가 좋지 않을 것 같다는 것과
내가 울면 언니가 눈치챌 수 있으니 절대 울지 말라는 것까지.
당시 언니의 뱃속에는 4개월 된 둘째가 있었다.
사력을 다했지만 밀려오는 죄책감이, 무력감이 단속이고 나발이고 소용없게 만들었다.
언니는 미친 듯이 소리쳤고 규리를 보러 가겠다고 했다.
간절하게 기도했다.
나는 좀 더 오래 살았으니 나와 맞바꿔 달라고, 살려만 달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고가 나버린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가족들과 언니의 시댁식구들에게서 좋지 않은 감을 느꼈다.
기도는 그렇게 허망하게 끝이 났다.
들어주지 않았다. 죄책감이 들었다.
아무도 너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지만 나만은 나에게 그러했다.
턱 아래 보이지 않게 새겨진 유리파편 흉터처럼 그렇게 자리 잡아버렸다.
하는 짓이 너무 예뻐 살면서 부릴 모든 애교와 잔망을 몰아서 하고 떠났다는 어른들 말이 있었다.
너무 똑똑하고 이뻤던, 이 세상에 놓아지기에 너무나 아깝던 천사 같던 아이 었기에 제 몫을 찾아 떠나간 걸까.
한낱 소잿거리로 전락될까 봐 망설임이 백번, 천 번 뒤따랐다.
부분 부분 선명했던 그날의 사진 한 장처럼 고이 남몰래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그 예쁜 얼굴만이 이다지도 기억나지 않는 걸까.
나는 있고, 너는 없다.
나보다 나의 언니가 더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걸 알기에, 사라진 너의 부재를 언니만큼 슬퍼할 수도 내색할 수도 없었던 숨어 지내던 나의 죄책감이었다.
편해지고 싶은 맘은 없다.
덜어내고자 함도 아니다.
기도는 실패했다.
더 이상 기원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무채색 같은 삶이었다.
그때.. 이모가 미안해.
이후에 이모가 어떻게 자랐는지는 만나서 꼭 이야기해 줄게. 네가 궁금해했던 다이어리의 모든 비밀 전부 알려줄게.
어떤 마무리로도 너를 끝맺을 수는 없겠다.
아마 평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