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랬던가, 맏이는 살림 밑천이라고.
언니를 보고 하는 말이려나.
언니는 나와 달리 한 회사를 오래 다니고 휴가 때면 집에 와 온갖 선물들을 풀어놓곤 했다.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전야제 사회를 볼 때 입을 예쁜 투피스에 내 어깨뽕은 치솟았다.
언니는 얼굴 보기가 어려우므로 볼 수 있을 때 많이 봐야 한다.
언니가 오면 제일 먼저 묻는다.
"언제 갈 거야?"
시간은 정해져 있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아깝다.
하교 후 달릴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자전거 페달을 밟아 언니가 아직 집에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언니의 존재를 확인하면 안심이 된다.
굳이 놀아주지 않아도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
다음에 오면 또 묻는다.
이번엔 언제 갈 거야?
하루라도 일찍 갈까 봐 조바심이 났던 건데 듣는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너는 오자마자 언제 가는지부터 묻냐고.
어린 맘에 의문모를 무룩함이 몰려왔다.
뜻 모를 서운함이 있었지만 싫어하면 안 하면 된다.
한 번은 기차를 타고 작은 아빠댁에 다녀오는 길이었던가.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오래된 기차, 겨울이라 기차 안은 따뜻했고 언니의 무릎은 잠 자기 딱 좋은 포근함이었다.
지나가는 역무원이 의문을 가지고 물었다고 한다.
왠 낯선 꼬맹이가 다 큰 아가씨 무릎을 베고 자는데 모르는 애면 깨워주겠다고.
나이차이가 났던 우리 사이를 알 리 없는 관계에 대해 언니는 친동생이라고 괜찮다고 했단다.
날 아주 무례한 어린이로 취급했단 거지.
언니에게 말을 걸고 싶었거나.(이거 신빙성 있잖아?)
어느 날 언니는 내게 생각지도 못한 무언갈 내밀고선 말했다.
"나도 이런 걸 챙겨주는 언니가 있었으면 했어. 너한텐 내가 해줄게."
2차 성징이 일어날 무렵 내게 건넨 상의 속옷이었다.
나라면 가능했을까?
언니는 그렇게 오래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처음으로 본가에 와 나름의 신부수업? 겸 쉬겠다는 선언을 했다. 그렇게 6개월을 같이 지내며 사춘기인 여동생과 결혼하기 전 예비신부의 신경싸움은 시작됐다.
엄마와 언니는 싸워도 돌아서면 먼저 말을 건네는 타입이라면 나는 며칠이고 본 척도 말도 안 하는 성깔 더러운 애 자체였다. 늘 화해의 손길은 언니가 내밀었다. 그리고 언니의 결혼,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언니를 빼앗기는 기분이라면 부모는 오죽할까..
아빠는 언니를 아픈 손가락이라 칭했고 그날의 비디오와 사진 속 엄마의 고개는 한쪽으로 기울어져있다.
형부는 언니가 오고 싶어 하면 언제든 처가에 오곤 했는데 나의 등교도 맡아주곤 했다.
멋진 차에서 내리는 나를 보고 아이들은 오~를 연발했고 제일 비싸고 좋은 나이키 운동화를 신었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무엇이든 사주고 용돈도 두둑하니 어깨뽕이 또 치솟는다.
그렇게만 유지되면 좋았을 인생이었다.
세월 안에는 언니에게 소중한 보물을 선물로 주고 도로 앗아갔다. 부와 안락함도 지속되진 않았다.
고된 삶이 시작되고 언니는 도망치지 않았다.
엄마가 그러했듯이..
언니는 느닷없는 삶의 무게를 피하지 않았고 나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무거운 선택과 그 끝을 향해 덤볐다.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좋아하는 보라색을 제껴두고 색깔 없는 것들을 채워가기 바빴던 힘든 세월을 걸었다.
그녀의 쉬지 않는 걸음 속에서 조카들은 성인이 되었다.
이제 보상받아도 되지 않을까 언니의 삶?
좋은 나날만 펼쳐질 거야.
난 언니의 시간 안에 태어나 사랑받고 자란 동생일 수 있었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