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 아니 회사가, 아니 사람이 엿같아서 관둔 적이 있다.
한두 번은 아니다.
인터뷰를 하면 실장들은 명함을 준다.
첫 출근, 나만 있는 게 아니었네?
나보다 어린 여자애, 나보다 한 살 많은 남자애, 그렇게 셋을 앉혀놓고 실장은 물었다.
"내 이름 아는 사람?"
저런,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뭐뭐뭐 실장님이요."
옛다-
말 못 한 나머지 둘은 시작이 좋지 않다.
실무 경험이 없는 여자애에겐 박대리의 경험을 토대로 내가 사수가 돼주었고 남자애는 인터뷰 때 본인의 포토샵 경력을 강력히 내세웠던 바, 실장이 주시하고 있었다.
한 달 후, 평가가 있는 줄 몰랐다.
어린 여자애는 '넌 성격이 좋아서 어딜 가도 잘할 거야' 하며 제법 무난한 방법으로 퇴사를 권유했고
한 살 많은 남자애에겐 '넌 어디 가서 포토샵 잘한단 말 절대 하지 마! 한 10년은 해야 될 거야. 아, 늘었다고 여기 재입사할 생각은 하지 말고.' 그렇게 보기 좋게 까이고 둘은 반강제 퇴사를 당했다.
남은 나는 불려 갔다.
회사 근처 스타벅스, 당시 먹지도 않던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구색 좋은 딜을 요청한다.
"너 제대로 된 사수 만난 적 없지?"
박대리 이 인간 참 끝까지 민폐다.
"내가 사수해 줄 테니까 나 믿고 한번 따라와 볼래?"
저 인간의 의중을 파악해야 한다.
두 명은 공개처형 됐고 날 끌고 가겠다는 건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보았다는 건데..
저놈의 실장은 평소에 날 이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And you화법이 없다느니- 농담을 할 줄 모른다느니 그렇게 까더니 작업은 맘에 들었나 보지?
"네, 해볼게요."
두 번째 찾아온 기회라면 기회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광고기획사 중 한 곳의 아웃소싱 회사다.
첫 번째 기획사는(왜 이다지도 할 말 많은 회사만 다녔을까..) 내 학력에도 불구, 아이디어 스케치북 하나만 보고 감탄한 실장이 내 손 땀을 인정한 바 다니게 됐지만 체력도 문제였거니와 이차저차 관두게 되었다.
여기서 구르자! 클라이언트 빵빵하고 한 3년만 죽은 듯이 썩으면 커리어는 어디 가서 안 꿀린다.
일은 많았고, 실력은 늘었지만 끌어준다는 말과는 다르게 정말 나만 굴렀다.
새로 온 디자이너들은 빽으로 들어오고 실무라곤 전혀 모르는 초짜였다.
하지만 좋았을 거다. 나와는 다르게 비위가 아주 강했거든.
같은 월급 받고 나만 일하는 거?
외근 후, 실장에게 컨펌을 받으러 갔다.
까도 너무 깐다.
그럼 실장님아, 너가 다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졸업식노래 까진 바라지 않아.
그냥 인간적으로는 대해줘라.
터줏대감의 여자과장이 말리고 달래는 것도 질려버렸다. 아들이 자폐증인거랑 실무적으로 까는 거랑 무슨 상관관계인지 도통 모르겠다.
업무시간에 둘이 밥통 사러 가는 것도 이해 안 갔어.
딱 한 번의 '좀 하네?'를 제외, 인색한 인정머리에 괴팍한 성질머리를 여자과장처럼 맞춰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게 맞는 건가?
내 책상은 늘 깨끗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관둘 수 있게 정리되어 있다.
실장에게 갔다.
"지금 이 시간부로 관두겠습니다."
그래-하고 콧방귀를 뀐다.
예상했다.
"내가 디자인 정 떨어지게 했다면 미안하다?"
"네, 덕분에 디자인으로 빌어먹는 짓 안 하려고요."
"내가 충고 하나할까?"
"아니요. 하지 마세요."
웃고는 있지만 어이를 상실한 것 같으니 그 간의 보상은 이걸로 되었다.
할 만큼 했고 이 날의 하늘은 울적하지도 않았으며
후회도 미련도 없다.
그리고 진짜 제일 싫었던 거!
점심때마다 된장찌개집만 찾아다니는 거 나 진짜 싫었어! 프레젠테이션도 일러스트로 다 바를 거면 그 좋아하는 메주나 쑤지 그랬어 이 양반아.
그때가 시작이었다. 머릿속에 이름을 지우려고 안간힘을 쓴 건..
살만하니 다시 떠올랐는데 쓸 수 없어 조금은 개탄스럽다.
아, 그리고 당신의 충고는 여전히 궁금하지 않아.
몸에 좋은 된장찌개 드시고 만수무강은 하신지?
동네 괴팍한 할아버지 타이틀은 따놓으셨어요.
축하합니다.
+ 저 이제 디자인 안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