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으로 빌어먹고 살지 않으려고 한동안 무얼 할까 고심을 했다.
지인이 다니는 회사를 보니 경력 없이도 된단 말에 무작정 따라갔다.
누구나 아는 경제와 시사지, 글로벌 매거진과 더불어 이 모든 걸 구독하면 문화생활의 이득도 서비스로 챙겨 준단다.
뭐가 됐든 실적만 올리면 된다는 거지?
입사 3주 만에 때려치운 썰을 푼다.
자료라고 불리는 DB 연락처를 토대로 무작위 전화를 돌린다.
대뜸 욕부터 하지 않으면 예의 있는 편.
맘 여린 친구들은 거기서 많이 울던데 난 뭐 얼굴 보고 듣는 것도 아니고 광고, 영업, 동의하지 않은 스팸 같은 전화가 반갑지 않은 거, 나도 이해한다.
나도 그걸로 통신사와 대판 싸웠거든.
정해준 스크립트를 보며 억양 없이 읽어만가는 주변 통화를 엿들으며 대강의 업무를 파악.
전략까진 아니더라도 멘트를 바꿔야 한다.
누구나 던지는 당연한 멘트로 사람들은 쉬이 지갑을 열지 않는다.
제일 약한 부분은 결제시스템인데..
이 부분이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렇게 쉽게 알려주지?
그게 가능?
가능.
고매하고 지체 높으신 그분들의 사무실과, 서재, 거실에는 그에 걸맞은 품격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이 저렴한 가격으로 당신의 수준 높은 생활이 주기적으로 제공되는데 이 기회를 놓치시겠냐-라고 하면 대부분의 소위 잘 나간다는 분들의 카드 번호는 이미 내가 적고 있었다.
조금은 집요하게 덤벼들었다.
클래식이 흘러나오는 아침, 모닝커피 한잔 하시는 사모님(?) 댁으로 콜이 꽂혔다.
문화 쪽이다! 무슨 놈의 감인지 이 건은 잡으면 무조건이다! 촉이 말한다.
고급진 라이프 스타일에 어울리는 매거진 하나 추천드리고자 한다,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되는데 어쩌고 저쩌고-
부장님이 신기해하며 콜을 잡고 놓지 않는 내게 다가온다.
빠르게 메모로 다급합을 알렸다.
<결제 어떻게 해요?>
카드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카드를 안 쓴다고 했다. 가족카드도 된다고 부장님이 빠르게 귀띔한다.
언니의 카드번호를 알려주신다.
다들 왜 이리 적극적인가..
(왜 알려줬는지 아직도 난 이해가 안 간다)
물론 믿을만한 회사이며 출처를 밝혔지만 당시 나는 인터넷 뱅킹도 안 하는 세상물정 모르고 믿을만한 건 이 세상에 없다는 주의라.
연락 가능한 번호를 물었다.
070~
"네? 그런 번호는 없는데요. 다른 번호 없을까요?"
나중에 알았다. 인터넷 전용 번호라는 걸..
순진하시고 나만큼이나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모님은 양질의 문화매거진을 접했지만
나 같은 영업콜은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한다.
부장님의 칭찬이 대단했다.
나도 내가 신기했지.
신입이라고 들어온 애가 보통이 아니야-라고 소문이 났다. 여자만 빼곡히 채워진 회사에 입소문은 빠르게 돌았다.
한 가지 썰만 더 풀고 3주 후로 돌아간다.
콜을 하면 할수록 재미가 붙었다.
입맛에 맞게 그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면 ‘아, 나 정도는 봐줘야지’ 하는 심리가 작용했다.
어느 대학교 조교를 만났다.
사담을 나눴다.
안 보셔도 된다. 나도 실습하면서 조교를 만났었는데 하는 일도 많고 여가시간엔 보낼 것도 없지 않냐
그런데 생각해 보라. 커피 한잔 값이면 너의 여가와 앞으로의 비전에 도움이 될 이 기회가 아깝지 않느냐라고 했다.
무척이나 고민하는 듯 보였으나 조금 더 진취적으로.
연극과 다양한 전시의 무료티켓도 주어진다.
안 할래?
엄청나게 고민하는 듯했으나 넘어왔다.
오늘도 한 건 했다. 눈높이 설득, 보람이 있다.
실적이 날이 갈수록 상승한다.
부장님은 신입의 대단한 패기에 항정살 회식을 쐈다.
다음 날,
조교에게서 전화가 왔다.
취소하겠단다.
아.. 어제 널 붙잡고 꼬드긴 시간이 얼만데..
이유라도 들어보자.
돈이 없다고 한다.
… 어제는 있던 돈이 오늘은 왜 없나요?라고 되물었다.
제발 부탁이니 취소해 달라고 한다.
제발 부탁이니 나도 취소는 안된다고 했다.
울기 직전으로 취소 안되면 자기는 안된다고 했다.
나도 안돼..
그럼 합의를 보자.
"사과하세요. 그럼 취소시켜 드릴게요."
정적.. 나도 무슨 심정으로 그랬는지..
거기에 들인 공과 시간, 그 시간에 다른 콜에 매진해 올렸을 내 실적, 놓친 것들에 대한 거야, 나도 그냥은 안 되겠어.
단순변심이 이렇게 무서운 거다.
사과를 받았다.
저 일을 계기로 지금 말로 약간의 현타가 왔다.
있는 사람들, 그래 부자들 한 달에 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허례허식 아닌 찐부자들의 거실에 하나쯤 놓여있을 그 허울 좋은 매거진 하나가 누군가에겐 아닐 수도 있지.
재미가 없어져 버렸다.
좋은 DB만 가지고 꽂았다 하기만 하면 카드번호를 냅다 갈겨버리는 회사의 원탑이 있었다.
가만 보니 모든 건 DB 빨?
진짜 부자들만 공략해서 돈이 돈 같지 않은 그들에게 아주 쉬운 영업을 머리카락 베베꼬며 조용히 실적의 최고를 찍고 있던 고인 물.
몰아주기식인가?
근거 있는 음모론이 제기된다.
지인과 그의 입사동기들은 형편없는 주워온 듯한 쓰레기 DB로 백날 전화를 돌려봐야
"내 번호 어디서 났어?".. 이거 너무 불공평하다.
슬슬 지쳐가는 애들을 끌어모아 사장 앞으로 갔다.
대강의 배경과 실체를 까발리며 우리는 단체로 스트라이크를 치겠노라라고 알려드렸다.
부장이 너를 왜 이뻐하는지 알겠다고 했다.
(부장님=여자 사람)
그리고 우리는 그 회사를 나왔다.
후에 친언니에게 선물해 준 향수가 오배송되는 바람에 향에 민감한 언니는 ‘이거 써도 괜찮은 거니?’ 에 사실 이 제품이~하고 그 회사 영업사원인양 광고 및 안심을 시켰다.
차로 이동하던 그 순간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랬다.
"넌 디자인이 아니라 영업을 해야 돼."
그래. 내가 떼돈을 못 번 건 영업을 안 해서,
현타가 빨리 와서,
끈기가 없어서,
부당한 꼬라지를 못 참아서..
라떼를 38,000원에 파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