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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by vakejun


머리가 짧았다.

한 달에 한번 머리를 자르러 다녔다.

용한 점집을 찾듯이 커트 좀 한다는 샵은 죄 찾아다녔다.


비싼 돈을 들이는 건 둘째고 내 마음에 쏙 들게 자르는 디자이너를 찾기란 꽤나 긴 여정이었다.

밸런스가 맞지 않거나 원하는 스타일을 캐치 못하거나 본인이 잘하는 것만 추구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몇 번을 고쳐 죽을 만큼 고민을 해봐도 이건 아니다 싶으면 죽상을 하고 가 '다시 해주세요!'한다.

이 미용실도 안녕이구나.


까다로운 손님인 것이다.


나의 요구가 그렇게 알아듣기 힘든가?

진실의 거울을 마주 보며 미용실을 끊기로 했다.

그렇게 몇 년, 난생처음 긴 머리를 가졌다.



어릴 때 동갑내기 사촌이 긴 머릴 하고 나타났을 때엔 충격이었다.(야.. 너마저..)

- 나 머리 기를 거야!

- 그래 길러~누가 말리냐?


엄마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엄마는 미용실에 갈 생각이 없었다.

당연하다.

머리카락은 시간이 지나야 자란다? 는 개념을 욕망 그득한 어린아이는 몰랐던 거다.

얼른 미용실에 가서 뚝딱! 하고 해결하고 싶은데 답답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언니, 오빠가 쓰는 스카치테잎 말고는 상상 그 이상의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자연스레 길어진 머리에 펌을 했다.

처음으로 여자답다-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자웅동체였던 것이다.


구불거리는 컬도 희한했고 주변의 반응은 더 희한했다.

내친김에 히피펌을 했다.

비니를 얹으니 폭탄머리가 반은 온순해진다.

비니를 사모으기 시작했다.



퇴원을 하며 그 긴 머리부터 처형하던 날,

나에겐 단발이 뒤지게 안 어울린다는 걸 알았다.


수를 쓰자면 붙임머리라는 방법도 있었지만

우울한 나는 그마저의 절차도 힘에 겨웠다.

거울을 보기가 싫었다.

그러기를 몇 년, 긴 머리를 다시 획득했다.


머리를 기르는 데엔 거울과 미용실을 끊으면 훨씬 수월하다.

진짜다.



모자를 쓰니 햇빛에 취약한 눈이 한결 편하다.

선글라스보다 오그라들지 않는 것이 손이 자주 간다.

모자만 보면 "써봐도 될까요?"가 자동으로 나온다.


어릴 땐 단순히 '시카고화이트삭스'의 로고가 예뻐 썼던 것이 지금은 '모자 없는 외출은 불가능'에 이르렀다.


주변에선 그 정도면 '문신 수준'이라고 했다.

반박의 여지가 없다.


사진첩을 보니 심각하다.

마스크까지 착용하니 눈만 빼꼼히다.



지금은 중기장의 생머리를 유지하고 이 머리를 유지하기 위해 또다시 미용실을 알뜰하게 다니고 있다.

커트에 진심인 분을 만나고 나니 스트레스 안 받아서 좋다.

잘 세팅된 마무리에 모자를 얹어버리는 건 아까운 일이지만 이 머리에 모자가 어울리는지를 체크하는 것이 우선이다.

나 또한 모자에 진심인 거다.



종종 그런 이야기를 한다.

난 아마 전생에 '의병'이었을 거라고.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독립운동을 하던 의병,

언제 어디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니 늘 단정한 차림새로 임했다던.


멋있다.


베레모, 버킷햇, 페도라도 제법 어울리니

틀림없이 의병이었을 거다.

좀 멋 내기 좋아하는 의병이라 눈에 띄어 빨리 잽혀갔을 거라는 추측은 피할 수가 없네?


전생에 못다 한 한을 풀고 있나..


모자 없이 머릴 묶고 멋내기용 안경을 쓰고 자주 가는 스타벅스에 갔더니 파트너님이 '못 알아볼 뻔했어요'라고 하신다.


위장에도 뛰어난 것이 의병이 아니고선 설명할 길이 없다.



모자 없인 모자란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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