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생물과 가전에게

by vakejun



어릴 때의 순수악은 잠자리의 날개를 찢고 개미에게 통통한 지문을 내주어 물게 하고 따끔거리면 구멍이 송송 나는 것을 보는 걸 좋아했다. 그러다 시들해지면 개미집을 찾아 나서 집을 허물곤 했다. 못됐다.


여름이면 강가에 가 멸치보다 작은 송사리를 잡아 모래 웅덩이를 파 가둬놓고 점심을 먹고 가 보면 사라진 게 신기하면서 이해가 가지 않아 다음부터는 잡은 놈들을 뙤약볕에 눕혀놨다. 점심을 먹고 가보면 송사리는 바짝 말려 쪼그라져 있다. 잔인했다.


비가 오면 간간이 나타나는 흙색의 돌멩이에 눈, 코, 입이 달린 움직임이 느렸던 두꺼비는 그냥 못생기고 징그러웠다.


진짜 친구는 따로 있었다.


집에는 몇 대의 자손을 걸친 '메리'가 있었다.

다른 집 '독구'보다 '메리'가 훨씬 좋았다.

사냥을 좋아했던 아빠는 주로 중, 대형견을 키웠는데 그 애들은 나이터울이 있는 진짜 내 형제들을 대신해 나의 매일을 함께 해주고 나의 온갖 짓궂은 장난도 받아주는 착한 아이들이었다. 시간이 지나 다음에 있을 아이의 이름도 '메리'였다. 다른 집 개들은 한 번에 열 마리의 새끼도 낳는데 유독 우리 집 메리들은 여섯 마리 이상을 낳은 적이 없다고 엄마 아빠는 말했다.


메리들은 온순했다. 어미개가 된 메리는 아직 눈도 채 뜨지 못한 새끼를 한 마리씩 가져다(난 늘 공평했다) 젖냄새를 맡고 비비적거려도 안절부절은 못했던 것 같지만 나를 물거나 해치지 않았다. 날 물었던 건 남의 집 사나운 어미개. 새끼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예민해진 그 옆을 지나갈 때 뛰어버린 것이 화근. 그렇게 무릎 안쪽살을 내주었다. 아직도 잇자국 흉터가 남아있다. 망할 놈의 개 같으니.. 이 집은 나중에 나의 원수가 되었다.

이 집의 자손은 형편없었고 사람 된 어미의 됨됨이가 그릇되어 그렇게 됐다.


두 번째는 이모가 반려견을 입양하러 간 집(나중에 안 건 무늬만 좋았던 '공장'이었다는 것) 방에 갇힌 말티나 요크 등의 소형견을 보고 거실을 지나야 만 하는 과정에서 70여 마리의 푸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그 두꺼운 데님을 뚫고 물어버리는데 주인남이 사료를 냅다 반대로 던지자 사라졌다. 그 후로 난 푸들이 싫다. 무섭다.


혼자 살면서 어찌하다 보니 고양이를 키우게 됐다.

사람에게 의존도가 높고 샤워도 잘하는 아주 착한 '샴'이었다. 이름은 '이끼'.

토끼에게 지어줬던 '관절'이와 '개똥'이보다 오래 살라며 지어줬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다.

녀석은 본가에서 몇 번의 털 실랑이로 실내생활을 저지당했다.

밖에서 나 없는 동안 스트릿출신 길냥이들에게 호되게 당해버렸다. 그렇게 싫다더니 아빠는 치료를 해주었다. 회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본가에 두고 올라온 후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갔을 때, 이끼는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이끼가 좋은 놈 만나서 같이 떠났다고 했다.


"이끼 수컷이야.."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몇 년 후 '이건 말하지 말랬는데..' 하면서 말문을 텄다.

이끼는 들고양이에게 그 후로 몇 차례 공격을 당했으며 상처가 심해 고치고 싶어도 내가 아니고서야 불러도 잡을 수도 없었다고. 나중에 죽은 이끼를 발견 후 아빠는 모래사장에 묻어주고 절대 내게 알리지 말고 도망갔다고 전하라고..


어릴 때 아무것도 모른다는 핑계로 학대했던 내가 받는 벌인 것일까.. 함부로 생물을 기르지 말라는 거다. 지어주고 싶은 이름은 메리가 아닌 특별한 이름이 한가득인데 희망사항만 됐다.

그래서 새로 생긴 가전 따위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SK매직의 제습기는 앞글자를 따 '스게'..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가버렸기에 이번엔 다른 집으로 갈아탔다. LG휘센을 사고 수없이 고민했지만 같은 맥락으로 '휘바라시'라고 지어줬다.


습도에 민감한 나는 친근한 가전들에게 전기도 주고 물도 비워주고 닦아도 준다.



로봇청소기가 생기면 얼마나 이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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