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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Jun 10. 2023

지지 않기 위하여

오래전에 읽었던 김연수의 글에서, 그는 지지 않는다는 게 반드시 이긴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했다. 나를 위해 자주 되뇌는 신선한 해석이다. 보통 부모가 아이에게 지지 말라고 한다면, 그건 이기라는 소리다. 하지만 사는 동안 우리는 찬란한 승리의 순간을몇 번이나 경험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냥 뭐가 됐든 지지 않기 위해 바둥거리며 사는 게 아닐까. 역시... 작가의 해석에 동의할 수밖에 없어진다.


수업에서도 종종 활용했던 『The absolutely true diary of a part-time Indian』 (Alexie, 2007)의 주인공 아놀드도 지지 않기 위해 바둥거리는 아이다. 심한 뇌부종을 가지고 태어났고, 자주 물로 배를 채우며, 아빠가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을 사들고 집에 들어오는 장면을 상상만 하는 아놀드에게 지지 않아야 할 대상은 삶 그 자체다.  


술, 가난, 포기, 죽음...

그 애가 사는 스포캔 인디언 보호구역 사람들은 이런 것에 아주 익숙하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많은 비극의 주된 원인은 술이다. 술 마시다 사고로 죽고, 음주운전으로 죽고, 술김에 불을 내서 화재로 죽고... 보호구역 인디언들은 연이은 죽음에 슬퍼하면서, 무언가에 지지 않으려는 버둥거림을 포기해 버린다. 그러니 점점 더 가난해지고... 배고픔을 잊기 위해 싸구려 위스키를 또 마신다. 누구도 지긋지긋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지 못하는 듯하다.


막 고등학교에 들어간 아놀드는 본인 손에 들어온 수학책이 20년 전 엄마가 썼던 책이었단 사실을 알고 분노한다. (그 지역 전체의 가난이 아이를 분노하게 했다.) 그리고 얼떨결에 친 사고가 꼬리를 물면서 아놀드는 보호구역을 벗어나 백인들만 다니는 작은 고등학교로 전학을 간다. 당연히 힘들다. 하루에 한 끼는 거의 굶고, 30킬로쯤 걸어서 통학할 때가 많은 아이의 현실을 한번 생각해 보라. 게다 학생의 90 프로 이상이 백인이고, 고등학교 졸업 후 70 프로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보수적인 학교에 다니는 유난히 작고 마른 인디언 아이... 휴... 아이가 견뎌야 하는 짐이 너무 무겁다. 그래도 아이는 지지 않는다. (이긴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래도 글은 대체로 유쾌하다. 제법 웃긴 카툰이 많이 삽입돼 생각만 해도 암울한 분위기를 가볍게 띄우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게다 그곳에서도 친구가 생긴다. (역시 쉽지 않았다) 댄스파티에 같이 갔던 여자 사람 친구가 아놀드에게 묻는다.      


“Are you poor?” (아놀드 너희 가난하니?)

더 이상 딴전을 피울 수 없었던 아놀드는 대답한다. “Yes, I’m poor.”

아빠가 데리러 올 거라고 거짓말하는 아놀드에게 여자애는 또 묻는다.     

“Are you telling the truth?” (정말이야?)     

그래서 답한다. 난 보통 걸어 다니기 때문에 괜찮다고.


She started to cry. (그 애가 울기 시작했다.).....

If you let people into your life a little bit, they can be pretty damn amazing. (다른 사람을 네 인생에 조금만 받아들이면, 그건 꽤 근사한 일이 될 수 있다.)


늘 맨땅에 헤딩만 하는 인생에도 조금씩 숨 쉴 구멍은 생기기 마련인 듯하다. 30 킬로쯤 걸어 집에 간다는 소리에 울어주는 친구가 있으면, 그게 바로 숨 쉴 구멍 아닐까. 그렇게 숨을 천천히 내뱉으면서, 배가 고파도 30킬로를 걸어 집에 가고, 내일도 포기하지 않고 똑같은 하루를 선택하는 이 아이는 분명, 지지 않는 아이다. 살면서 영광스러운 승리의 순간을 많이 경험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지지는 않는다.


아이는 자신을 보호구역과 백인 사회에 반씩 걸려 있는 파트타임 인디언이라고 했다. 유목민이었던 인디언 조상의 진정한 후예인 파트타임 인디언. 포기와 가난에 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며 오늘도 발걸음을 옮기는 유목민.      


예전에 오클라호마주를 지나다 인디언 보호구역에 가 본 적이 있다. 어디론가 흘러갈 곳이 없어 고여있는 큰 물구덩이같이 느껴지던 곳. 안내하는 분은 우리에게 이런저런 가내수공업장을 보여주었고, 인디언 댄스도 보여주었고, 예전엔 자신들에게 고유의 사상도 종교도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남침례교인 (Southern Baptist)이라고 했다. 그 소리에 한 백인이 할렐루야! 를 외쳤던 그 씁쓸한 기억. 분명 그곳에도 대물림하는 가난과 술 파티와 자포자기라는 일상에 지지 않으려고 버둥거렸던 누군가가 있었을 거다. 오클라호마, 체로키 인디언 보호구역에 사는 아놀드. 이 책은 이런저런 직설적이고 외설적인 표현 때문에 출간된 지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난 여전히 버둥거리고 있을 아놀드를 온 힘을 다해 응원한다.


궁금하다. 그 유목민에게 어딘가 정착해서 쉴 곳이 허락되는 날이 올까?

아니어도 할 수 없다. 그래도 지지는 않을 거다. 다시 말하지만, 이긴다는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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