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서점가를 강타했다고 하는 성혜나의 소설집 『혼모노』
-길티클럽: 호랑이 만지기
‘나’는 우연히 본 영화 때문에 감독에게 빠졌고,
“조폭도 나오지 않았고 여성이 무참히 희생되지도 않았으며 신파도, 생에 대한 헛된 희망이나 자비도 없었다. 무엇보다 캐릭터가 독특했다. 악인도 아니지만 선인도 아닌, 굳이 말하자면 괴인에 가까운 인물 군상.” (21)
그 후 열심히 덕질하는 ‘나’,
감독 관련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는 ‘나’ 덕분에 텍스트엔 온통 트렌디한 커뮤니티 전용 용어?가 등장한다. 급기야 ‘길티클럽’이라는 감독의 팬클럽 정모에까지 참석하는 나 (참석한 이들은 맛이 요상? 하지만 감독이 좋아한다는 시큼한 맥주를 마시고, 온갖 굿즈를 팔고 사고, 감독의 영화 얘기를 하고, 영화제에 참석한 감독과 영상통화를 한다는 목적으로 해외에서 진행되는 영화제가 끝날 때까지 남아 있는데...)
당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감독의 문제로 인해 그들 사이에 열띤 토론? 말싸움이 벌어지자 ‘나’는, 감독의 영원한 지지자인 ‘나’는 과감하게 감독을 위한 든든한 실드까지 치고,
“심지가 다 타기 전에 누군가는 이 폭탄을 멀리 던져야 했다. 던지지 못한다면 몸으로라도 덮어 막아야 했다. [...] 나는 그만큼 지독한 사랑에 빠져 있었으니까.” (49)
하지만,
후에 찾아갔던 영화 시사회,
관객 앞에서 멋들어지게 펼쳐 보이던 감독의 연기를 보면서,
“펑.
내 안에서 무언가 터졌다. 매캐한 연기가 사방을 감싸듯 눈앞이 뿌예졌다. 땅이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왜 이러지.” (57)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말 허구 아닐까 하는, 내가 실패한 영화를 한 편 본 게 아닐까 하는. 별 반개도 아까울 만큼의 너절한 서사. 치덕치덕 처바른 클리셰. 질문도 남지 않고 더할 말도 없는 싸구려 엔딩. 감독이 지고 만 영화.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영화. 그렇게 지독히도 못 만든 영화를 본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그런데 왜 생각할수록 더.... 허무해질까. 모든 게 흠 없이 온전한데 왜 나만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살점이 다 뜯겨 너덜너덜해진 것처럼 괴로운가. 왜 지독히도 헛헛한가.” (58)
시간이 흘러
남편과 찾아간 치앙마이의 타이거 킹덤 체험에서,
“호랑이가 불편한 듯 근육을 움찔댈 때마다 척추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쩐지 죄를 저지르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흥분되었다.”
“그건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어떤 모럴.” (65)
모든 게 포장되고 연기되는 세상. 감독의 퍼포먼스를 보며 정성스레 쌓아 올렸던 허상이 ‘펑’ 하고 깨졌던 때처럼, 야생성을 잃은 호랑이를 만지며 다시 한번 길티 플레저 guilty pleasure를 느끼는 ‘나’.
제 모습을 그대로 보이고 사는 게 하나도 없다는 자각에서 오는 허망함. 그러나 꾸며낸 모습이 타인의 시선을 잡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느끼는 묘한 짜릿함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라면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밖에 없는 길티... 플레저... 가 아닐까...
-스무드
제프(미술가)의 매니저인 듀이는 위스콘신에서 태어난, 한국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한국에 대한 사전지식이 제로인 듀이, 스무드하고 매끈한 세상을 추앙하는 듀이는 한국이 험한 곳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닌 체 한국 땅을 밟는다.
“제프의 작품에는 분노도 불안도 결핍도 없었다. 바버라 크루거나 뱅크시의 작품처럼 무엇을 비판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전지식 없이도 감상할 수 있고 뭘 안다고 감상이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그런 매끈한 세계를 추앙했다.” (71)
제프의 전시회가 진행될 장소는 매우 프라이빗한 부자 동네로 건물을 벗어나지 않고, 누군가와 겉도는 대화 때문에 굳이 신경 쓰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일상의 모든 일이 가능한 곳이었다.
“하지만 굳이 안 가도 괜찮아요. 바깥은 시끄럽고 번잡하거든요. 이 안에서 더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예요.” (77)
건물 청소 시간에 밖으로 나간 듀이의 휴대폰 배터리가 떨어져 우왕좌왕하는 사이 한 떼의 노인들과 만나는데,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다니는 노인들이 떼로 몰려 있는 생경한 모습에 당황한 듀이,
그중 한 명의 노인이 아들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의 보물이라고 소개하자,
“보물. 내 아버지에게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라 그랬던 걸까. 미스터 김과 나 사이에 세워진 두꺼운 벽에 가느다란 실금이 생긴 것 같았다. 느닷없이 이상한 통증이 일었다.” (98)
“당신에게 무척 고맙다고 전해달랍니다. 당신이 아주 소중하대요.”
“타인에게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가족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감정의 가느다란 실금이 점차 벌어지더니 뜨거운 무언가가 그 바깥에서 울컥 밀려들어 오듯 온몸이 달아올랐다.” (101)
“알 수 없지만, 아주 좋은 하루였어요.”
태극기 부대 속에 휩쓸려 들어가 노인들과 짧은 시간을 보낸 듀이,
그는 끝까지 자신이 어떤 경험을 한 것인지 인지하지 못했지만,
듀이에게 미국인임을 강조했던 아버지와는 너무 다른, 자식이 보물이라고 말하는 한국인들이 이상하다고 느낀다. 대화도 불가능하고 그들의 정체도 모른 채, 그저 이런저런 도움을 받으면서 매끈함과는 거리가 먼 촌스럽고 투박한 하루를 보내는 듀이. 끝까지 통증의 원인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빗장뼈 부근에 통증을 느낀 듀이는 단순히 좋았다고만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하루였다고 느끼는데...
매끈함만을 지닌 인간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쾌적한 실내에서만 일생을 보낼 수도 없을 것이고. 그가 보낸 하루는 밖의 날씨와 떼로 몰려다니는 사람들에게 적나라하게 노출된, 예상치 못했던 하루였지만, 그는 자신이 몸으로 경험한 하루가 나쁘지 않았다고 느낀다. 덕분에 그가 외부에서 몸으로 경험해야 하는 어떤 하루를 다시 맞이하게 된다면, 이전처럼 불안하거나 불쾌하기만 하진 않으리라.
그나저나 듀이 같은 사람과 태극기 부대를 만나게 하다니, 재미있는 설정이다. 왠지 내 빗장뼈까지 뻐근하게 눌리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혼모노
삼십 년을 영업한 만신의 앞집으로 이사 온 신애기.
햄버거 먹고 PC 방에나 가야 할 것 같은 아이가 말한다.
“장수 할멈이 점지해 줬어. 네놈 앞집에 들어가라고.”
“신빨이 다했다더니 진짠가 보네. 할멈이 나한테 온 줄도 모르고.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120)
안 그래도 신빨이 다 했다는 초조함을 느끼던 만신은 애송이 같은 신애기가 신경 쓰인다. 이제 그가 비밀스럽게 바라는 건, 무형 문화재가 되는 것. 자신이 지금껏 모신 장수 할멈이 거기까지만 밀어준다면...
시장에 출마한 단골이 굿을 부탁해 오자,
그 굿판에서 떨어진 신빨 때문에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꼼꼼한 준비를 하는 만신.
하지만 시장 출마자가 자신을 버리고 신애기에게 굿을 맡겼다는 소식을 듣고,
막 벌어진 굿판을 찾아가고,
“이것은 나와 저 애의 판이다. 누구의 방해도 공작도 허용될 수 없는 무당들의 판이다.” (150)
“이제 누가 더 오래 버티나의 싸움이다. 이 서사의 주인공을 가르는 건 그것이다.” (152)
“삼십 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153)
혼모노, 일본말로 ‘진짜’라는 뜻이라고 한다. 우선 소재가 독특하고 호흡이 엄청 빠르다.
신빨이 다한 만신과 신애기 사이 누가 혼모노인지 겨루는 굿 한판.
원래 신을 처음 모신 신애기의 신빨이 가장 충만하다고 하던데... 재미있는 건 만신이 모시던 할멈이 신애기에게 옮겨갔다는 것. 자신의 주요 고객을 빼앗겨 약이 바짝 오른 만신이 신애기의 굿판에 찾아가 함께 춤을 추고. 만신은 일생일대의 중요한 춤을 춘다. 누가 혼모노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 그 경계에서 혼모노를 묻다.
단편이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묘사는 최소화하고 빠른 스토리 진행만 하는, 요즘 글쓰기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난 단편이다. 고전만 많이 읽는 나 같은 사람은 글의 스타일이나 빠른 호흡에 적응이 좀 힘들었다. 마치 엄청 이미지 강한 숏폼을 입을 헤 벌리고 본 느낌이랄까?
그 외 작품들(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우호적 감정, 잉태기, 메탈)도 매운 여름날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좋은 단편들이란 생각이다.
그런데... 소설이 앞으로 계속 이렇게 변화할 것인가? 란 질문 또한 하게 했다는...
넷플렉스 왜 봐? 성혜나 보면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