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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 읽기

『나무야 나무야』

by 새벽

1996년 출간된 『나무야 나무야』

고(故) 신영복 님께서 1995-1996년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글을 모은 책으로 역사와 현실이 공존하는 여러 곳을 여행하며 적어 간 글들이다.


몇 년 전에 읽었을 땐 슬슬 넘기며 읽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다시 손에 잡으니, 이번엔 서문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갑니다.”에서부터 뭔가가 턱 목구멍을 막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페이지를 쉽게 넘기지 못하고 몇 분을 보냈다. ‘우직함이 세상을 바꾼다’는 완전 공감하지만, 왜 굳이 ‘어리석은 자’일까?


아마도...

어리석다는 건 세상살이에 능한 현명한 사람이 아니란 의미일 것이다. 세상살이에 능한 사람은 손해를 보지 않고 빨리 길을 가겠지만, 천천히 가더라도 타인과 연대하며 우직하게 가는 사람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테니.

선생께서 찾아간 스물다섯 곳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이 땅의 이곳저곳이고, 곳곳에 삽입된 사진과 그림은 (특히 그림) 한참 또 시선을 머무르게 한다. 유명 소주 상표에도 쓰인 선생의 글씨는 ‘신영복체’ 폰트로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하지만, 그의 손 그림 또한 꽤 수준급이란 생각이다. 선생의 수필집 『처음처럼』같이 이 책에서도 그의 손 그림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여느 해보다 청명하고 길었던 가을이 끝나고 있습니다. 등 뒤에 겨울을 데리고 있어서 가을을 즐기지 못한다던 당신의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p.18)


역사는 우리가 맡기지 않더라도 어김없이 모든 것을 심판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몫은 우리가 내려야 할 오늘의 심판일 따름입니다.” (p.23)


나는 문득 당신이 진정 사랑하는 것이 소나무가 아니라 소나무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p.26)

묘청, 신돈, 녹두 장군에 이르기까지 미완성은 또 다른 미완성으로 이어져 역사가 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 미완은 반성이며 가능성이며 청년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그러기에 과학이기 때문입니다.” (pp.46-47)


이어도는 실재하는 섬이 아니라 환상의 섬입니다. 피안의 섬이고 가멸진 낙토입니다. 그러나 이어도는 동시에 이승을 떠난 사람들이 머무르는 눈물의 섬이며 비극의 섬이기도 합니다. 희망과 절망이 하나의 섬에 가탁(假託)되고 있는 이어도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세상의 어떤 다른 섬보다도 더울 현실적인 섬이라고 생각됩니다. 세상에는 절망으로 응어리진 땅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희망으로 꽃피고 있는 땅도 없기 때문입니다.” (p.56)


용기와 지혜는 당신의 말처럼 '결합의 방법'입니다. 선량하나 나약하지 않고 냉철하나 비정하지 않고 치열하나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 '결합의 지혜' '결합의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p. 59)


그 또 하나의 손이 짐을 들어주는 손이 아니라 손을 잡아주는 손이기를 바랍니다. 천수보살의 구원이 손길이 아니라 다정한 악수이기를 원합니다.” (p.71)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어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는 비약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81)


가장 강한 사람이란 가장 많은 사람의 힘을 이끌어내는 사람이며, 가장 현명한 사람이란 가장 많은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p.99)


“옛사람들은 물에다 얼굴을 미추지 말라고 하는 ‘무감어수’(無鑒於水)의 경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표면에 천착하지 말라는 경계라고 생각합니다. ‘감어인’(鑒於人)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과의 사업 속에 자신을 세우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추어 보기를 이 금언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p.128)


역사는 과거로 떠나는 여정이 아니라 현재의 과제로 돌아오는 귀환입니다” (p.148)

남아 있는 유적들을 조립하여 과거를 복원하는 상상력이 아니라 그 과거의 모습으로부터 현재를 직시하고 다시 현재의 연장선상에서 미래를 향하여 우리의 시야를 열어나가는 상상력임을 깨닫게 됩니다.” (p.152)

왜 제목이 『나무야, 나무야』일까? 나무는 혼자 살지 않기 때문에? 땅, 햇살, 빗물, 이웃 나무와의 관계 속에서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조용히 우직하게 천천히 살아가는 나무는 혼자만 약삭빠르게 사는 게 아니라 이웃과 연대하며 살아가니, 나무를 메타포로 연대하는 인간다움의 회복을 희망하는 바람 같은 의미가 아닐지.


선생께서 찾아가 엽서를 띄웠던 얼음골, 반구정, 모악산, 백담사, 온달산성, 지리산, 섬진강 나루, 북한강, 이천의 도자기 가마, 백마강 같은 익숙한 이름의 장소 중 난 과연 몇 곳이나 가 보았고, 그곳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았을까?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인데, 이런 곳들을 찾아볼 생각을 한 적이 있었나? 이런 곳들이 켜켜로 품고 있는 역사의 이런저런 얘기에 귀 기울이기보단, 해외의 유명하다는 곳에 찾아가 근사한 포인트에서 사진을 찍고, 맛집을 돌아다니고, 비싸고 편한 숙소에서 보내다 오는 것에만 가치를 두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부여에는 상상력을 가지고 와야 한다는데, 생각해 보면 나 또한 부여의 여러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그때, 그곳의 수많은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려보곤 했다. 하지만 선생의 말씀처럼 남아 있는 유적들을 조립하여 과거를 복원하는 상상력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그 과거의 모습으로부터 현재를 직시하고 다시 현재의 연장선상에서 미래를 향하여 시야를 열어나가는 상상력이 우리에겐 필요하리라.


우선 쉽게 찾을 수 있는 곳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 그곳에서 역사의 많은 이야기가 오늘 내게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귀를 기울여 보는 것 자체가 훌륭한 공부가 아닐까. 혹여 오가는 길에 마을 앞 아름드리 느티나무라도 보게 된다면, 그 앞에 앉아 그늘을 드리우며 내게 자리를 내어주는 그의 우직함을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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