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의 마지막 장편 『바움가트너』를 읽었다. 표지 그림을 노려보느라 최소 십 분은 쓴 것 같다. 노인의 얼굴 실루엣 안에 정원의 꽃나무와 파란 하늘이 있다. 하늘 위로 흰머리가 덮여 있는... 표지가 주는 이미지와 메시지가 에... 그러니까...
바움가트너는 칠순 노인으로 프린스턴을 퇴임한 철학 교수이다. 소설은 10년째 독신으로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면서 자연스럽게 늙어 가는 노인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1장이 참 기막히게 시작한다. 70대 노인 바움가트너. 누가 보면 고독사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혼자 사는 노인의 아침. 사소한 우연이 겹치며 어찌나 짜증 나게 문제가 번져나가는지, 일진 참 더럽단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하루의 시작.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의 묘사가 기막히게 자연스럽지만 진짜 짜증 나는 일의 연속이다. 이런저런 관계없어 보이는 일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결국 그는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 앞에서 넘어지는 사고?를 경험하고 집에 들른 수다쟁이 초보 검침원 에드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모터가 달린 튼튼한 입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이며, 그는 자문한다, 이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말의 흐름은 무슨 수단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짜증이 점점 심해지지만, 이 선량한 멍청이에게 약간은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허파를 열어 목청껏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지르는 대신 들릴 듯 말 듯 작은 한숨을 내쉬며 지하실로 통하는 문으로 걷기 시작한다.” (p.17)
“얼음이 없네요, 방금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걸 발견한 아이, 또는 방금 신이 없다는 걸 발견한 사춘기의 탐구자, 또는 방금 내일이 없다는 걸 발견한 죽어 가는 사람 같은 쓸쓸한 어조로 그가 말한다.” (p. 23)
젊은 수다쟁이(검침원 에드)가 가진 선의의 힘이 그를 놀리거나 심술을 부리고 싶은 충동을 압도하는 바람에, 심술궂은 노인은 (비록 다치긴 했지만) 어찌어찌 하루를 시작한다. 번잡스럽고 짜증 나는 하루 속에 우연히 찾아온 착한 청년이 있었고, 내내 붙잡고 있었지만 그래도 새삼스럽게 기억해 낸 애나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고, 그리고 언제나 있었지만 눈여겨보지 못했던 뒷마당 세상이 보였다.
“대단하군, 바움가트너는 혼잣말을 한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애써 이런 일까지 다 하다니. 똥대가리들과 이기적인 짐승들만 가득한 세상에 자비의 천사 같은 이런 선량하고 순진한 사람이 나타나다니.” (pp. 28-29)
언뜻 생각하면 그의 하루가 무척 외롭고 비참할 것 같지만,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그저 누구나의 하루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젊은이들처럼 하루에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 일을 겪지는 않지만, 그도 아침을 먹고, 글을 쓰고, 때가 되면 정원에 나가 주변 자연을 관찰하며 즐기고, 그리고 가끔 집에 들러 인연을 만든 이런저런 인물들과 만나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하마터면 쓰러질 뻔하지만 쓰러지지는 않고, 하마터면 가지 못할 뻔하지만 간다.” (p.30)
환지통, 그는 아내의 죽음으로 그의 팔다리를 뜯겨 나갔다고 느끼고, 그 이후 주욱 환지통을 느끼고 있다.
“이 통증의 생물학적 또는 신경학적 측면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고난과 상실의 은유 역할을 할 수 있는 힘에 있다.” (p.36)
“그는 이제 인간 그루터기,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었던 반쪽을 잃어버리고 반쪽만 남은 사람인데, 그래, 사라진 팔다리는 아직 그대로이고, 아직 아프다. 너무 아파서 가끔 몸에 당장이라도 불이 붙어 그 자리에서 그를 완전히 태워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p.37)
작가는 소설 중간중간 애나가 썼던 글도 삽입하면서 바움가트너에게 환지통을 느끼게 하는 아내를 간접적으로 소개하고, 그의 어린 시절 얘기도 소개하면서 바움가트너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그의 타임라인을 따라가는 단선적인 구조가 아니라 현재와 과거가 뒤섞여 있어 이야기는 빠르게 전개된다.
어느 날, 애나의 물건이 고스란히 보관된 방에 들어갔다가 10년 전 사고로 죽은 애나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그녀는 죽음이 우리가 지금까지 상상했던 것과 다르며 유물론자들이 주장하듯 내세가 없다는 가정도 틀렸지만, 기독교도,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불교도와 다른 모든 교도의 내세 또한 잘못된 생각이라고 설명한다. 죽음 뒤에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아무 데도 아닌 거대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곳은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공간, 소리 없는 무의 진동, 망각의 공허라고 했다. (p.75) 또한, 그녀가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내세의 삶, 의식적 비존재라는 이 역설적 상태를 계속 유지하게 해주는 존재가 바움가트너라고 생각한다고 전한다. 이런 상태는 언젠가는 끝나겠지만, 그가 살아 있고 그녀를 계속 생각할 수 있는 한 그녀의 의식은 그의 생각으로 깨어나고 또 깨어날 것이라 덧붙인다. (p.77)
‘나를 기억하는 사람을 통해 내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도 곧 사라져 갈 것이다.’ 애나와의 전화, 그리고 죽음에 대한 그녀의 설명. 죽음 뒤의 세계가 이렇다는 게 내게 큰 위로를 주었다. 작가(폴오스터)가 암 투병 중 이 소설을 썼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그가 원하는 사후가 이런 모습이지 않았나 싶다. 내가 떠나고 나를 기억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잠시 머물다 그 기억과 함께 영원히 소멸한다. 꽤 맘에 드는 설명이다.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공유하다 먼지로 사라진다.
어쨌든 현재까진 고독사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바움가트너. 그에게 아내의 시를 연구하고 싶다는 어느 학생의 이메일이 도착하고, 그 이후 바움가트너는 이 아이 (박사과정 학생)와 아내의 작품 얘기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급기야 겨울에 그곳에 찾아와 아내의 모든 작품을 보겠다는 아이를 맞기 위해 그는 에드(검침원이었다 정원사가 된)를 불러 집과 정원을 손보며 바쁘게 손님맞이 준비를 한다.
“이 아이는 진지하다. 그는 혼잣말을 했다. 물어볼 것을 다 물어보고 있다.” (p.205)
“저 덩치 크고 움직임이 투박한 에드, 지상에서 가장 주목받지 못하는 축에 속하는 사람이 어디를 가나 생명을 퍼뜨리는 재능이 있다니.” (p.215)
마지막 장을 넘길 땐, 적어도 바움가트너의 마지막이 고독사는 아닐 거란 확신을 했다. 물론 그가 외롭지 않다는 건 아니다. 홀로 늙어가는 노인이 어떻게 외롭지 않을 수 있나. 하지만 그의 외로움 또한 굉장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게 이 글의 매력이라 할까? 어차피 필멸의 인간에게 고독은 피할 수 없는 필연 같은 것일 테니.
바움가트너는 천천히 고독과 노화를 받아들이며 순응하려 한다. 그사이 간혹 새로운 인연이 찾아들고. 시간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른다. 더 나이가 들면 어떠한 어려움이 또 그를 찾아올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있고, 자신의 노화 과정을 천천히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하고, 반항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현자의 모습이다. 아름답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폴오스터의 마지막 작품. 투병 중 마지막 힘을 쥐어짜 완성했다는 작품. 그에게 감사와 박수를 보낸다.
Rest in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