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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읽기

『폭싹 속았수다』

by 새벽

‘임상춘’이란 (본명이 아니구나 싶던) 이름을 기억한다. 그(녀)의 작품(동백꽃 필 무렵)엔 소외되는 인물이 별로 없었다. 인물 하나하나가 다 저마다의 서사를 품고 등장했기 때문에 골목 상인들까지 다 기억하게 했던 드라마였다. 올봄 넷플에 오픈된 『폭싹 속았수다』도 ‘임상춘’이란 이름을 달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봐야 할 작품이었다.


70, 80년대를 주요 배경으로 한 서사라고 해서 신파? 일까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느 세대나 쉽게 자신의 이야기라고 공감하게 하는 얘기가 아니었을까. 광례(애순 엄마)에 공감하는 전후의 보릿고개 경험 세대/애순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부모 세대/금명에게 백퍼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나 같은 세대. 그러니까... 거의 전 세대를 아우르는 인생 이야기가 다채롭게, 매우 속도감 있게 전개된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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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도 해 먹을 거라는 그러나 시인이 되고 싶었던 요망진 (야무진) 애순.

-여섯 살부터 애순만 바라보며, 대통령이 될 애순의 영부인이 목표라며 인생의 목표점을 애순으로 고정했던 관식.

-애순만큼 요망진 그러나 욕심을 받쳐주지 않는 환경과 무겁디 무거운 K 장녀로서의 책임감 기타 등등으로 자신 또한 사는 게 만만치 않았던 애순의 장녀 금명. 얼렁뚱땅 사는 듯 보였지만 잔잔하게 웃음과 눈물을 선사했던 아들 은명.

-이 가족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인물들 (해녀 삼총사, 관식 엄마, 학씨 등)


이들 모두가 기막히게 시끄럽게 그러나 기막히게 조화로운 그림으로 65년이란 짧지 않은 삼대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호로록 봄,

애순과 관식의 시작은 유난히 호로록 지나가 버린 ‘봄’ 같았다. 열여덟, 열아홉 나이에 야반도주를 감행하고 덜컥 부모가 된 두 사람. 어린 엄마, 아빠의 앞에 놓인 현실은 무겁고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매일 아침 배 타러 가는 남편에게 함박웃음을 보이며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애순은 만개한 봄꽃 같은 모습으로, 빈 도시락 통을 흔들며 돌아오는 관식은 호로록 가는 봄이 고생스럽지만은 않은, 척박한 땅에서도 비집고 피어나는 들꽃 같은 모습으로 그들의 봄날을 살아낸다.


꽈랑꽈랑 (쨍쨍) 여름,

그들의 쨍쨍한 여름엔 만선의 기쁨도 있었고 가슴에 묻는 아픔도 있었다. 작은 오징어잡이 배의 선장이 되고, 금(명), 은(명), 동(명)의 아빠가 된 관식은 무쇠처럼 가정을 지키지만, 앞으로 달려드는 운명을 어쩌지 못했다. 태풍이 불던 날 동명을 잃은 어린 엄마, 아빠에게 꽈랑꽈랑한 여름은 매운 햇살 뒤에 무서운 태풍을 숨기고 있던, 저리고 아픈 계절이었다. 그래도 쨍쨍한 여름 해와 사납게 집어삼키던 바당은 가족을, 아이들을 키웠다. 관식(박보검)이 구청에서 동명의 사망 신고를 하다 주저앉아 우는 장면이 가슴을 진하게 후벼 판다. 꽃미남으로만 알았던 그가 진짜 배우가 됐구나 싶었던 오래도록 기억날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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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락자락 (주렁주렁) 가을,

아이들과 함께 커가는 애순은 어촌 계장이 된다. 축하 잔치에서 신나게 음식을 나르던 관식이 애순에게 좋냐고 묻자, “나 좋아, 너무 좋아.”라고 말하는 애순. 딸 금명의 눈에는 좋아하는 꽃무늬 신발 하나 못 사 신는 바보 같은 엄마지만 사실 그녀도 빛나는 봄, 쨍쨍한 여름을 겪으며 한껏 잘 살아내고 있는 거였다. 금명의 유학 때문에 죽은 엄마(광례)가 살았다는 이유로 애써 구입했던 바당 근처 집을 팔고 작은 아파트로 이사 가는 가족. 고마움과 미안함을 짜증과 화로 표현하는 금명. 참... 기막히게 생생하게 그려낸 엄마와 딸 사이. 영원히 아옹다옹거리며 영원히 서로에게 가장 끔찍할 가족은 자락자락 가을처럼 이것저것을 거두어들이고, 또 손에서 떠나보내며 그렇게 나이를 먹어 간다.


펠롱펠롱 (반짝) 겨울,

“나랑 산 세월이 괜찮았어?” 무쇠 같던 관식이 사그라들며 묻자, 애순이 답한다. “더할 나위 없었어.” 딸에게 “나는 나대로 기똥차게 산 거야. 내 인생 좀 깐히 보지 마.”라고 하는 애순은 자신들의 겨울 또한 봄, 여름, 가을 못지않게 쨍하게 반짝인다는 걸 보여준다. 금명이 엄마의 시가 적힌 공책을 출판사에 보내고, 엄마의 시는 한 권의 시집으로 출간된다. 요양원에서 시를 가르치며 ‘선생님’ 소리를 듣는 요즘이 자기 인생 최고로 높은 자리에 있다고 말하는 애순은 펠롱펠롱한 겨울을 아직 살고 있다. 그들의 겨울은 다시 봄으로 이어지며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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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 삼대 중심의 서사. 못 배우고 없이 자란 여자여서 더더 배고프고 힘겨웠던 광례와 시인이 되고 싶었던, 야망 크고 요망진 그러나 없는 현실을 물려받아 악다구니로 살아야 했던 애순, 엄마 아빠의 꿈을 먹고 자랐지만, 그녀 역시 팍팍한 현실과 싸우며 기어이 자신만의 세상을 일구어낸 금명. 이 삼대의 이야기는 바로 내 할머니, 엄마, 그리고 나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이야기에 그렇게 흥분했던 건지도.


*금명과 충섭의 결혼 에피소드는 결혼에 대한 엄마의 지혜로운 가르침 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온도가 다른 사랑. 나를 나답게 하는 사람.


*제주 남자와 결혼한 서울 며느리로 시댁에만 가면 네이티브들의 실감 나는 사투리에 노출되는 나는 드라마 속 인물들이 사투리를 거의 쓰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었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독하게 노력하는 배우들도 그 사투리 잘 쓰기가 정말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어줍지 않게 사투리를 썼다면 오히려 몰입을 방해할 수도 있었겠다 싶은.


*와우! 작가의 필력에 다시 한번 박수를. 삼대에 걸친 65년 간의 이야기. 제주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깨알같이 근현대사를 배열하고, 각 인물의 서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끌고 간 스케일과 필력. 역시나 어떤 인물도 소외되지 않고 다 돋보이게 했던 넓고 따뜻한 시선.


*배우들도 참... 그들 각자에게 인생작으로 남지 않을까 싶게 남김없이 자신의 모든 걸 갈아 넣은 듯한 연기.


세상 모든 부모들 죽어도 자식은 살아져.

나는 우리 금명이가 상을 차리는 사람이 아니라 상을 막 엎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느 며느리가 나 며느리보다 위는 위다.”

수틀리면 빠꾸.

살민 살아진다.

그들의 꿈을 먹고 나는 날아올랐다.”

되게 귀한 자식이던데... 저도 되게 귀한 자식이거든요.

영범아, 나는 니가 너무 좋은데, 나도 너무 좋아.

다 같이 오는 소풍인 줄 알았는데, 저마다 물때가 달랐다.

모두가 가장 뜨거운 사랑과 결혼을 할까? 크기가 아니라 온도가 다른 사랑이었다. 나를 나답게 하는 온도. 나는 나만의 왕자님을 만났다.

너에게 나의 천국을 준다.

그리고


너무나 어렸고, 여전히 여린 그들의 계절에 미안함과 감사. 깊은 존경을 담아.

폭삭 속았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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