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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 읽기

『태고의 시간들』

by 새벽

올가 토카르추크의 비교적 초기작(1996)으로 여러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태고의 시간들이라... 태고는 당연히 시간을 의미하는 거라 짐작했지만 소설은 “태고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 태고는 공간으로, 시간이 중첩되는 지점이다. 첫 장은 마치 ‘옛날 옛적에 ∼’로 시작하는 신화, 설화 같은 느낌이다.


전체 84개의 조각글들이 촘촘히 엮여 작은 마을 ‘태고’의 역사를 그렸다. 등장인물의 범위가 어머어마하게 넓어서, 외딴 마을 태고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 동물, 식물 (과수원, 보리수나무, 버섯), 심지어 사물에게까지 그들만의 ‘시간’을 할애하며 각각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마치 파놉티콘 같은 서술자의 관점에서 태고 마을을 바라보는 느낌으로 서술되었다는 점도 글에 신비감을 더하는 역할을 했단 생각이다.


작가는 80년이란 긴 시간을 연대기적으로 그리기보단 각각 주체 (개인, 세대, 자연, 신)의 시간이 병렬적으로 흐르는 것처럼 보여주고 있다. 인물들은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면서도 신화 속 등장인물 같기도 하다. 특히 크워스카라는 인물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합치 (안젤리카라는 식물이 마치 그녀의 딸, 루타의 아버지처럼 상징하고 있음) 같은 상징을 자유자재로 하고 있다.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잘 나타나는 인간과 자연 (동, 식물)의 공존 역시 이 작품의 주요 이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작품을 읽다 보면 모든 생명체가 자연스럽고 평화적인 모습으로 공존해야 한다는 윤리적 시각을 갖게 되는데 이는 작가가 내게 미친 아주 큰 영향 중 하나이다. 아마 다른 독자들에게도 그렇지 않았을까?


두 개의 세계 대전이라는 격변의 시기를 살아낸 태고 마을 사람들.

이야기는 이들의 삶에 초점을 맞춰, 역사책이 서술하지 않은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 사이에 파고든 역사적 격변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쉽고 직관적으로 격변의 의미를 그려 보게 한다.


그녀가 언제부터 이런 조각글 형태의 소설 쓰기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읽은 4권의 소설 중 1권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을 빼면 전부 이런 조각글 형태였다. ‘이를 통해 그녀가 얻고자 하는 바가 무얼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파편적인 서사가 모여 하나의 큰 이야기를 만든다는 건 아마도 ‘다양한 목소리와 시선이 모여 집단의 역사(서사)가 된다’는 의미일까?


신화집 같은데, 무수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소설.

경계 없이 연결된 넓고 광활한 세계를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그려낸 소설.

폴란드 가상의 마을 ‘태고’의 역사가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역사란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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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신인가, 인간인가? 혹은 신이면서 인간인가, 아니면 신도, 인간도 아닌가? 내가 인간을 창조했는가, 아니면 그들이 나를 만들어냈는가?” (147)


“시간을 초월한 신이 시간과 시간의 변형된 형태 속에 현존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땐, 변화하고 움직이고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지 않고 흔들리고 사라지는 모든 것을 주시하면 된다.” (193)


“독일인들은 나쁜 사람들이었지만 태고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만약 군복을 입지 않았다면, 구별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222)


“내 정신에도 마비가 왔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268)


“이렇게 그는 과거를 전부 돌아보았다. 그 시간 속에는 아무것도 건질 게 없었던 것이다. 그저 끊임없는 투쟁과 채울 수 없는 야망, 이루지 못한 꿈만 있을 뿐이었다.” (313)


“죽음에 대해 학습할 필요가 없다는 여기는 어리석은 자들, 마치 시험처럼 죽음의 과정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렇게 죽은 자들의 시간 속에 갇히게 된다. [...] 죽은 자들은 이곳에 와서야 삶이 끝난 후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음을 깨닫게 된다. 죽고 난 뒤에 비로소 생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 발견은 헛된 것이었다.” (332)


“살아 있는 모든 것의 근간은 땅속에서 서로 만난다.” (345)


“인간은 자신의 고통 속에 시간을 묶어 놓는다. 과거 때문에 고통받고, 그 고통을 미래로 끌고 가기도 한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절망을 창조한다.” (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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