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운명
첫 남편, 두 아이의 아빠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출입문이 따로 있는 옆방이었지만,
젊은 청상의 집안에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아이들을 좋아했고, 아이들도 유난히 그를 따랐다.
집주인 여자와 세입자 남자의 묘한 한 집 살이.
마치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1995년판 같았다.
아이 둘을 키우는 젊은 과부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총각은
이웃들의 입방아와 쑥덕거림의 중심에 있었다.
동이는 그 소리가
자신뿐 아니라 아이들에게까지 번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견딜 수 없었다.
“저는 이 상황이 너무 싫어요. 아이들이 놀림받는 것 같아 걱정도 되고요."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 형편에 동이씨와 아이들을 고생시킬 수는 없어요.
조금만 더, 사업이 안정되면 그때 식 올립시다.”
남자가 세 들어온 지 10년의 세월이었다.
기다림은 점점 고통으로 변했고,
동이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최후통첩을 날렸다.
“이렇게는 못 살아요. 다음 달에 방 빼겠습니다.”
그 말에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며칠을 침묵하던 그가 동이가 시간제로 일하던 미용실로 찾아왔다.
손에는 마시다 만 맥주병이 들려 있었다.
“당신이 나랑 결혼 안 해주면… 나, 죽어버릴 거야.”
그 말은 울음과 술기운이 뒤섞인 비명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땡깡이었다. 나이 마흔의 어른이 부리는 생떼.
10여 년의 세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의 흐트러짐.
‘이런 행동까지 할 건 뭐람?’
동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속으로 중얼거렸을 뿐이다.
그의 절박함이 연민으로, 연민이 책임감으로 번졌다.
그 생각이 마음을 짓눌렀다.
며칠 뒤, 그는 제정신으로 찾아와 조용히 사과했다.
“엊그제 일은… 미안했어요. 그런데 나, 정말 당신 없이는 안 되겠어요.
그 말은 진심이었고, 동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동이는 두 번째 남편과 맺어졌다.
신혼이랄 것도 없었다.
식도 없이 혼인신고만으로 부부가 되었고,
둘은 여전히 같은 집, 같은 일상 속에 살았다.
차이랄 건 남자의 방에 있던 옷장이 거실 한편으로 옮겨졌다는 것뿐이었다.
남편은 속이 깊은 사람이었다.
집 밖에서 일어난 일은 절대 집안으로 가져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동이와 아이들을 살뜰히 챙겼다.
말수는 적었다.
동이는 그 과묵함이 든든했다.
가끔 손 편지를 써서 건넸다.
투박한 글씨였지만 그 안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주말이면 축구를 즐겼다.
아이들과 공을 차는 모습이 마치 오래된 가족사진처럼 따뜻했다.
세월이 흐르며 남편의 사업도 서서히 안정되기 시작했다.
생활비도 넉넉히 챙겨줬다.
동이는 살면서 처음으로 윤택한 나날을 보냈다.
늘 구겨져 있던 삶의 가장자리가 조금씩 펴지는 느낌이었다.
단 한 가지 염려는,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동이는 그 사실이 마음 한구석에 남았다.
하지만 남편은 억지로 아이가 생기는 걸 바라지 않았다.
“우리 넷이면 충분하잖아.”
그는 늘 그렇게 말하며 동이의 조급한 마음을 어루만졌다.
서른여섯에 두 번째 결혼을 한 동이였다.
바로 아이를 가진다 해도 적지 않은 나이였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 마흔이 되던 해, 기적처럼 임신 소식을 들었다.
아이는 그녀보다 마흔 살이나 어린 생명이었다.
첫째 철이와는 무려 스무 살이 차이 나는 늦둥이였다.
그는 동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 뛸 듯이 기뻐하며
철이와 석이를 불러 앉혔다.
“얘들아, 너희들 동생이 태어나면 나를… 아빠라 불러줄 수 있겠니?”
둘째 석이가 눈을 반짝이며 동이를 보았다.
“정말이야? 엄마, 우리한테 동생 생기는 거 맞아?”
동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석이가 먼저 그를 향해 외쳤다.
“아빠! 축하드려요”
철이가 말을 받았다.
“이제 와서 말씀드리는 건데~~
처음 저희 집에 오셨을 때부터
아저씨가 우리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저희의 아빠가 돼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따뜻해졌다.
동이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친아빠가 세상을 떠난 지 18년 만에 두 아들이 아빠를 부른 순간이었다.
동이는 그 세월 동안 늘 아이들에게 미안했었다.
억척같이 살아냈지만, 자신이 아빠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에게 언제나 무엇인가를 빚지고 사는 기분이었다.
그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게 된 것 같아 흘러나온 눈물이었다.
그날 밤, 동이는 오랜만에 깊은 잠이 들었다.
아이가 태어나던 날,
그는 병원 복도에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뛰었다.
“딸이래요! 딸. 저는 딸바보가 될 거예요.!”
그의 목소리에는 세상 모든 기쁨이 담겨 있었다.
그날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라면,
세상에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아이의 이름은 ‘별’이라 지었다. ‘한 별’.
커다란 별, 하나뿐인 빛이라는 뜻을 담은 이름이었다.
회복실 침대에 누운 동이를 바라보며 남편이 오랜 기억을 꺼냈다.
“고생 많았어. 그리고… 고마워요.”
그가 잠시 숨을 고르고,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당신… 내가 처음 당신 집 보러 왔던 그날 기억나요?”
“아, 방 보러 왔던 날이요?”
“응.”
동이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땐 그냥… 인상이 참 괜찮은 사람이다, 그 생각만 났어요. 왜요?”
남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그때, 당신이 석이를 업고 있는 줄 몰랐어요.
그저 석양을 등지고 서 있던 당신 몸이 후광으로 빛나 보였어.
그 모습이 너무 눈부셔서… 그냥 두말없이 계약했지 뭐야.”
그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때 그 방, 참 초라했는데도 말이에요.”
근데 말이죠… 그 선택이 이런 행복을 가져올 줄이야. 하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회복실의 정적 속에서 우렁차게 퍼져나갔다.
동이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살짝 훔치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행복의 미소였다.
두 아들과 늦둥이 딸은 핏줄로는 오누이가 아니었지만
서로를 진짜 가족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
성은 달랐다.
강 철, 강 석, 그리고 한 별—
그 이름 셋이 동이의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한 페이지가 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별이 아빠의 휴대폰 배경은 언제나 별이 사진이었다.
장바구니에는 인형과 머리끈이 늘 들어 있었고,
퇴근길마다 작은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렀다.
그는 별이의 웃음으로 하루를 열었고,
별이의 잠든 얼굴을 보며 하루를 닫았다.
그의 세상은 오직 별이 하나로 빛났다.
은혜와 감사가 넘치는 나날이었다.
부부는 매일의 삶을 찬송으로 마무리했다.
할렐루야!
하늘은 또다시 동이에게 무심했다.
머뭇머뭇하다가 10년 만에야 제대로 꾸려진 가정이었다.
그리고도 4년,
그렇게 어렵게 얻은 늦둥이가 열 살이 되던 해—
건강하던 별이 아빠에게 불길한 전조가 찾아왔다.
속이 더부룩하다며 그저 소화제만 처방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룩해진다는 말을 듣고,
동이는 불안한 마음에 억지로 그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진단 결과는 간암이었다.
불룩하던 배는 복수가 차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동이는 간호학원까지 다녔던 자신의 무심함에 땅을 쳤다.
남은 시간은 고작 6개월.
그 순간,
동이의 하늘은 다시 무너졌다.
남편은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몸은 뼈대만 남았다.
정해진 이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동이는 초조해졌다.
그녀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던 질문을 끝내 꺼내놓았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남편은 잠시 멈칫했다.
입을 열 듯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7월 28일!
스물일곱 해 전, 첫 남편이 세상을 떠난 바로 그날이었다.
그날이 다가올수록 동이는 공포에 질렸다.
밤마다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제발… 그날만은 피해서 데려가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기도는 절규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시간은 잔인했다.
그날 밤,
숨이 점점 가늘어져 가는 남편 곁에
동이는 얼굴을 묻었다.
“여보… 별이 아빠… 제발 한마디만 해줘요.
당신 가고 나면, 나… 어떻게 살아야 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남긴 그 한마디 붙잡고…
나, 별이 잘 키울게요. 그러니까—”
남편의 눈이 잠시 그녀를 향했다.
힘겹게 입을 열었으나, 목이 잠겨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력을 다하는 몸짓. 종이를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얼른 약봉지를 건넸다.
그가 글씨를 썼다.
단 한 글자였다. ‘빛’
숨은 점점 가빠졌고,
그의 목소리는 끝내 세상에 닿지 못했다.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며 다시 열렸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입 안에서는 공기만 새어 나왔다.
두 번째 사별의 순간이었다.
남편이 남긴 한 글자. ‘빛’
동이에게 그 의미를 헤아려볼 정신은 없었다.
“안 돼요… 제발, 오늘만은…”
그러나 스물일곱 해 전 그날처럼,
하늘은 오늘도 동이의 기도를 외면했다.
무언가를 전하려다 끝내 남겨지지 않은 말.
그 절망의 눈빛이 동이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바보… 그러게, 진작 말을 했으면 얼마나 좋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동이는 남편의 차가워진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그 손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 밤,
동이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조용히 저물었다.
장례식장 안은
향 냄새와 흰 국화 향이 뒤섞여 있었다.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고,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사람들은 검은 옷자락을 여미며 한 줄씩 분향소로 들어섰다.
“왜 그 사람은…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났을까. 약봉지에 쓰인 ‘빛’은 무슨 의미였을까”
동이는 영정 앞에 앉아 속으로 중얼거렸다.
슬픔이 너무 오래되어 눈물조차 마른 듯했다.
그러나 남편이 남긴 말을 곱씹어 볼 마음은 되지 못했다.
“평생 받을 아빠의 사랑을 10년 동안 다 받아서였을까…”
별이의 얼굴에는 슬픔이 거의 비치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늦둥이 딸.
그 아이는 누군가의 얼굴을 찾으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엄마 저기 선생님 오셨어.”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동이의 가슴이 문득 쿵 하고 내려앉았다.
“우리 별이도 오빠들처럼… 이제 아빠가 없구나.”
그 말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자,
가슴 깊은 곳에 묻혀 있던 울음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왜…
왜 내가 낳은 아이들은 모두 아빠가 없는 거야…”
순간, 장례식장은 숨을 죽였다.
그리고 곧,
문상객들의 눈물샘이 무너졌다.
절규하던 동이의 시선 끝에 검은 상복을 입은 두 아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철이와 석이—
두 번씩이나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이었다.
엄마의 절규를 들은 두 아이는
하염없이 천장을 바라보며 굵은 눈물방울을 연신 훔쳐냈다.
“얘들아… 엄마가 정말 미안하다.”
그 말과 함께 동이의 몸이 휘청였다.
세상이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녀는 까무러치듯 쓰러졌다.
그리고 그날의 장례식장은 향 냄새와 함께
동이와 세 아이의 울음소리로 잠시 멈춰 섰다.